사이트맵 닫기

목이 긴 여자

문학과여행 로고 아이콘

남미영

책 아이콘문학 이야기 창간호 2025년 4월 1호

그녀는 그냥 예쁘기만 한 여자는 아니었다. 길가다 마주치면 저도 모르게 미소지으며 바라보게 되는 그런 여자였다. 갸름한 얼굴과 검은 머리, 갈색 눈동자가 담긴 가늘고 긴 눈매에 목이 좀 길었다. 혼자 있을 때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에 그녀의 목이 왼쪽으로 살짝 기우러지곤 했는데, 그럴 때면 사람들은 저마다 그 모습에 딱 맞는 말을 찾으려는 듯 눈을 깜박이다가, 그냥 ‘목이 기네’라고 말하곤 했다.

 

여자는 서른아홉 살이고, 서울에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펜트하우스에 살고 있다. 그녀는 대기업의 중역이었던 남편과 1년 전에 이혼했다. 가정 법원에 제출한 서류에는 ‘성격 차이’라고 적었지만 사실은 ‘성적 차이’였다. ‘합의 이혼서’를 작성하던 날 그녀의 남편이 말했다. 우리는 ‘성적 취향’이 너무 달라. 12년 동안 노력해 봤지만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 미안해. 이 아파트와 신혼시절에 살던 청담동 집을 당신 앞으로 등기해 놓았어. 그리고 매달 생활에 필요한 돈이 당신 통장으로 이체 될 거야. 물론 물가상승률이 적용될 거고••••••. 경제학을 전공한 그녀의 남편은 이혼 절차를 경제적으로 처리했다. 남편은 처음 데이트를 시작하던 날 레스토랑에서 ‘샴페인?’하고 물었을 때처럼 ‘괜찮지?’라고 말했다. 그녀도 그날처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깔끔하게 마무리 되었다.

그들의 결혼은 전래동화처럼 시작되었다. 남자는 부자고 잘생겼고 친절했으며, 여자는 착하고 아름다웠지만 내새울게 없는 하급공무원의 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신데렐라라고 불렀다. 그러나 결혼 1주년이 지나자 두 사람의 결혼은 재미없는 동화처럼 지루해졌다.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우리 결혼이 재미없어진 건 당신이 섹스를 싫어하기 때문이야.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잖아?”

남편은 섹스에 탐닉했고, 여자는 다른 것을 사랑했다. 노을 지는 하늘 바라보기, 흘러가는 강물 바라보기, 어린 시절에 읽은 동화책 회상하기, 눈물 흘리며 슬픈 영화 보기 같은 것들을. 처음에 남편은 여자의 취향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비효율적’이라는 경제적 용어를 사용하며 점잖게 비난했다. 그들은 그렇게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밤이 되면 남편은 굶주린 사자처럼 달려들어 그녀를 먹어치웠고, 여자는 야수에게 잡혀온 미녀처럼 오들오들 떨었다. 어느 날 한바탕의 섹스 후에 임신 2개월의 첫아이가 유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자는 며칠 동안 울고 난 후에 일체의 섹스를 거부했다. 남편은 그녀를 신경정신과 의사에게 데려갔다. 의사가 말했다.

“마스터스 앤드 존슨의 연구에 따르면, 여자 35세부터의 성 기능은 신체적 기능이 아니라 정서적 기능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질문지 650문항을 체크하고 정서적 문제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의사가 비슷한 문항을 표현을 달리하며 반복해서 물었다. 그녀가 바보가 된 기분이 들 즈음에 의사가 ‘내면 탐구 중’이라고 말해주었다.

“별문제 없는 데요. 배우자의 외도도 아니고••••••.”

‘그런데 왜 그랬죠?’ 의사가 은유적인 질문을 눈빛으로 던졌다. 여자도 은유적으로 답변했다.

“제대로 살고 싶었어요.”

의사는 여자가 동문서답한다고 생각했다. 동문서답이란 정신질환의 초기 증상 중 하나고•••마침내 단서를 찾은 탐정처럼 의사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지나갔다.

“제대로 사는 건 어떤 상황일까요?”

의사가 신중하게 다음 미끼를 던졌다.

“그건, 안나 카레리나가 남편 카레닌을 떠나면서 한 대사입니다.”

의사는 자신이 잘못 짚은 것을 알고 ‘아•••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혼하고 가정법원을 나설 때 남자가 말했다. 다시는 결혼하지 마. 당신은 착하고 아름답지만 결혼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 여자는 ‘동의 한다’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고마워. 남자는 방금 데이트를 마친 연인처럼 오른 손을 번쩍 들어 작별 인사를 하고 다른 차를 타고 갔다. 당신은 행복한 인생에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여자는 남자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말은 입속에서 맴돌았다. 위자료가 두둑해서 그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직장을 구하거나 다시 결혼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자는 미술대학교 2학년 때 캠퍼스에서 의상학과 교수의 눈에 띄어 런 웨이에 섰다. 처음에는 학생들의 작품을 입고 런 웨이를 걸었지만, 차츰 찾는 곳이 많아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패션모델이라고 불렀다. 얼마 후에 유명 제약회사의 청량음료 광고를 찍었는데 매출이 수직 상승했고, 그 회사 사장 가족의 청혼을 받았다. 여자의 부모님과 교수님 그리고 친구들은 손뼉을 치며 그녀를 재벌 2세인 청량음료 가족에게 떠밀었다. 그리고 12년 만에 이혼하고 두둑한 위자료와 함께 돌아오자 그들은 또 손뼉을 쳤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여자는 자신이 어딘가에서 잘못 날아온 새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가짜고, 어느 날 진짜 인생이 ‘짠’하고 나타날 것만 같았다. 나는 어디서 왔을 까. 무지무지하게 먼 곳에서 왔을 까. 다른 별에서 태어나 지구로 뚝 떨어져 온 게 아닐까?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지방의 소도시에서 우체국에 근무하는 하급행정직 공무원의 딸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해 보니까, 함께 살고 싶어 하지도 헤어지고 싶어 하지도 않는 덤덤한 부부의 외동딸이었다. 그래도 이 부부는 자식 교육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한국의 여느 부모들과 다르지 않아서, 네 살 배기 딸이 벽에 그린 새를 보고는 미술에 소질이 있다며 미술학원에 등록 시켰다. 미술학원 원장은 신동이라고 선전하며 그녀의 그림을 미술대회에 보내어 상을 받아왔다. 어린 신동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거쳐 정해진 수순인양 자연스럽게 미술대학에 들어갔다. 그러고 어느 날 화가가 아닌 패션모델이 되었다.

런 웨이에 오르면 여자의 발밑에 커다란 풍경화가 두루마리처럼 주르륵 펼쳐졌다. 검정색과 흰색의 조약돌이 촘촘히 박힌 좁은 골목길이거나, 세로로 긴 창문이 달린 붉은 뾰족지붕의 고풍스러운 집들이 늘어서 있는 주택가거나, 포도 향기가 풍기는 시골의 오솔길일 때도 있었다. 그녀가 펼쳐진 그림 속으로 익숙하게 걸어 들어가면 객석에서 환호가 터졌다. 뷰티 풀! 판타지아!

패션쇼가 열린 날이면 여자는 밤새도록 꿈을 꾸었다. 음•••이 냄새, 이 색깔. 블록 씌워 저장하고 싶은 데••••••. 그것은 어느 곳의 냄새고, 어느 곳의 색깔일까? 아침에 깨어나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가물가물 멀어지는 냄새와 색깔을 기억하려 애썼지만, 사라지는 연기처럼 잡을 수가 없었다.

 

⁎⁎⁎

11월의 차가운 아침에 여자는 베란다로 나와 흔들의자에 앉았다.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 때, 여자의 눈에 문장 하나가 들어왔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세요? 그러면 여행을 떠나세요.’

그 문장이 여자의 가슴을 흔들었다. 문장은 유리탁자에 놓여있는 C일보 1면 하단을 차지하고 있는 여행광고의 메인 카피였다. 여행광고 치고는 좀 엉뚱했지만, 여자의 가슴이 마구 흔들렸다. 더 읽어보았다. 유명 미술평론가의 해설을 들으며 떠나는 미술 전문여행. C일보가 기획한 3회 짜리 프로그램의 마지막 회 차. 여행 코스는 뉴욕과 워싱턴에 있는 유명 미술관 탐방이고, 대한항공 비즈니스 석에 프리미엄급 호텔에 묵는 럭셔리 여행이라는 문구도 보였다. 여자는 전화를 걸어 여행을 신청 했다. 낯선 미술관에서 런 웨이를 걷듯 명화들 사이를 걷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12월 하순에 여자는 일곱 명으로 꾸려진 여행 팀에 끼어 인천공항을 떠났다. 출발하던 날, 비즈니스 라운지에서 만나 차를 마실 때, 인솔자 현 교수가 말했다.

“오늘 참가자 중에 두 분은 첫 회부터 참여하셨고요, 네 분은 처음 참가하셨습니다. 서로 자기소개를 나누며 친숙해지시기 바랍니다.”

목관악기에서 흘러나온 듯 낮지만 부드럽고 절도 있는 현 교수의 음성에서 안정된 삶과 예술적 성취를 이룬 남자의 카리스마가 풍겼다. 일행은 새로 부임한 담임선생 앞에 선 착한 초등학생들처럼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3년 만기 적금을 부어 이번 여행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30대 중반의 중학교 미술 교사. 그녀는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모태 솔로’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은근히 ‘모태’를 강조했지만, 그녀에게 호기심을 보내는 이는 없었다. 겨울방학이면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의 쌍까풀 수술이 쇄도하여 1년 매출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지만, 자기도 성장하고 싶어서 3년째 이 여행에 참여하고 있다는 강남의 성형외과 의사. 늙어가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듯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고 밍크코트를 걸친 남자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는데, 스스로 공개했다. 49세의 ‘돌싱’이라고. 모두 웃었다. 미술교사가 제일 크게 웃어서 일행은 또 한 번 웃었다.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얼굴들이었다. 책을 쓰기 위해 유명출판사의 지원을 받으며 여행한다는 50대 남자. 그동안 그가 어떤 글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모두 그를 김 작가님이라고 불렀다. 등에는 무거운 배낭을 지고 목에는 촬영용 카메라를 걸고 있는 그의 껑충하고 마른 체구가 외로워보였는데, 입고 있는 회색 바바리의 단추가 하나 떨어져 있어서 더 외로워보였다. 그리고 헤어진 첫사랑과 50년 만에 다시 만나 신혼여행을 왔다는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다녔다. 자기들은 70세 동갑내기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말하면서 자꾸만 웃었다. 부인이 남편을 ‘철수 씨’라고 불렀다.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여자는 ‘그냥 요’라고 말했다. ‘설마, 이 비싼 여행을 그냥 왔을 라 구요? 돈이 그렇게 많아요?’ 하듯 모두들 그녀를 흘겨보았다. 그러나 여자는 달리 더 할 말이 없어서 바닥에 깔린 카페트의 기하학적인 무늬만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썬 글라스 덕분에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하늘색 A라인 캐시미어 코트와 둥근 챙이 자연스럽게 휘인 검정색 모자를 쓴 그녀를 보며 누군가가 ‘배우 같아’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현 교수는 일행을 데리고 워싱턴국립미술관을 거쳐 뉴욕현대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미술관으로 갔다. 그러고 10일째 되는 날 뉴욕구겐하임미술관으로 향했다.

이 건물은 1959년에 완공되었는데요, 세계 최초로 관람객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두고 설계한 건축물입니다. 그래서 현대에 지어진 건물인데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맨해튼 가 센트럴파크 옆에 있는, 달팽이 껍데기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생긴 둥근 건물 앞에서 현 교수가 그날의 강의를 시작했다.

“이 건물은 위로 갈수록 지름이 점점 넓어지는 완만한 역삼각형 구조구요, 자연광이 쏟아지는 중정의 채광창을 둘러싸고 1층에서 6층까지 전체가 하나의 나선형 회랑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고 관람할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는 1층과 6층만 운행하구요.”

“그러면•••구경은 어떻게?” 노부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구경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래서부터 위로 걸어 올라가며 보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보는 방법입니다. 아래서 올라가며 볼 때는 시선이 살짝 위를 향하게 되고, 내려오며 볼 때는 아래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올라가며 감상하는 방법이 등산이라면 내려오며 감상하는 방법은 산책쯤 된다고 할까요?”

“그럼 내려오며 보는 게 다리가 덜 아프겠네. 그렇죠? 철수 씨?”

부인의 말에 철수 씨가 딸의 재롱에 화답하는 젊은 아빠처럼 고개를 과장스럽게 끄덕이는 바람에 모두들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액자 없는 캔버스에 그려진 ‘화살에 맞은 사자’가 맨 먼저 일행 앞에 나타났다. 캔버스 뒤편에서 인공바람이 부는지, 벽에 걸린 사자가 몸을 뒤틀고 있다.

“동물 그림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노조들 수법이네.”

미술교사가 학생들 앞에서처럼 교육적 멘트를 날리자 현 교수가 주의를 주었다.

“자신의 감상을 일반화하지 마세요.”

“두 개의 태양은 필요 없는 법이니까.” 성형외과 의사가 끼어들었다.

“•••말을 못하게 해.” 미술교사가 입을 부루퉁한 채 성형외과 의사를 흘겨보았다.

“자, 이 인형을 설치한 작가의 의도를 짐작해볼까요?”

현교수가 누군가 실수로 떨어뜨린 쓰레기인양 대리석 바닥에 누어있는 한 덩이의 석고 인형을 가리키며 일행을 둘러보았다. 인형은 남녀가 꼭 껴안은 형상을 하고 바닥에 누워있다. 처음 보는 이색적인 전시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잡고 있던 노부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여자의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역사를 훔쳐본 것 같아서.

회랑을 두어 시간 쯤 거닐었을 때, 현대 회화가 나타났다. 피카소의 그림이 보이자 일행의 휴대폰이 갑자기 바빠졌다. 작품을 찍기도 하고, 작품 앞에서 ‘치즈’ 하며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피카소는 행복할까? 후세의 사람들이 자기 그림을 감상은 하지 않고 찍기만 하는 것을. 그가 살아있다면 ‘찍지 말고 감상 하세요’라고 소리치지 않을까? 여자는 피카소의 ⌜우는 여인⌟ 앞에서 생각했다. 모네와 고흐 그리고 르누아르의 그림 앞에서 현 교수의 인상파 강의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몇 층 쯤 내려왔는지 짐작이 되지 않는 지점에 조그만 간이카페가 나타났다.

“달달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라는 데••••••.”

‘아메리카노’를 손에 든 성형외과 의사가 여자의 ‘카페라떼’에 눈을 주며 맞은편 의자에 앉는다.

“단맛은 섹스보다도 강한 쾌감이지요. 혀 위에서 설탕이 녹는 시간이 섹스보다 빠르고 확실하니까요.”

여자는 딴 곳을 바라보고, 의사는 그녀 앞으로 몸을 기우린다.

“그런데 여사님은 왜 사진을 안 찍어요? 그동안 한 장도 안 찍던 데••••••”

“•••카메라 보다 눈을 믿는 편이어서 요.”

“눈을 더 믿는다? 하, 그거 처음 듣는 소린데요? 눈이야 아무리 좋아도 2.0이지만, 스마트 폰은 적어도 1,200만 화소에서 1억 화소까지 지원하는데요?”

의사가 토론에서 기승을 잡은 패널처럼 싱글거린다.

“눈은 피사체를 경험하지만, 카메라는 형상만 포착하는 것으로 아는 데요? 둘 다 잘할 수는 없잖아요?”

“가만있자•••그거 어디서 들어본 말 같은 데?” 의사가 기억 저장소를 노크하듯, 오른 손 검지로 자신의 머리통을 톡톡 두드린다.

“아하! 싸이가 작년에 올림픽경기장에서 열렸던 ‘흠뻑 쇼’에서 10만 관중을 향해 외쳤죠. ‘찍지 말고 보세요! 눈 속에 담아가세요!’•••그러고 보니 싸이의 팬?”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듯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렇지만 전송하려면 눈으로는 안 될 텐데••••••.”

“전송할 의무를 가지고 여행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가족이나 친구에게는 인증 샷이라도 보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 의무에서는 프리입니다.”

“아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린데요?”

자신을 ‘돌싱’이라고 소개했던 의사의 입술이 벙긋 벌어진다. 이혼한 그녀의 전남편도 그랬다. 결혼 전, 부하가 올린 여자의 ‘이성관계 조사보고서’를 보면서 저렇게 웃었다. 그녀와 접속된 남자는 세상에 없었다. 여자는 일어나서 일행 속에 섞여들었다.

 

“저는 이 작가의 그림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두 세 발자국 앞서 걷던 현 교수가 14호쯤 되어 보이는 작은 초상화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이제까지 본 모네, 피카소, 르누아르의 대작들에 비하면 그냥 무심히 지나칠 수 있을 작은 소품이다.

“노란 스웨터를 입은 잔 에뷔테른. 1919년.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그림 옆에 붙어있는 금색 동판에 음각된 검은 글씨를 현 교수가 또박또박 읽어나간다. 성서를 낭독하는 성직자처럼 목소리에 경건함까지 서려있다.

초상화 앞에서 여자는 멈칫했다.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인 채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초상화 속 얼굴이 낯익었다. 흡사, 자신의 빛바랜 돌사진을 대했을 때처럼 가슴이 아릿해 왔다. 여자는 흐려지는 눈으로 그림을 응시했다. 그림 속의 여인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눈동자가 없는 꿈꾸는 듯한 눈에 아슴프레한 미소를 띠운 채.

“모딜리아니는 사조를 싫어한 화가입니다.”

여행기간 내내 ‘화가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술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던 현 교수를 기억하는 일행이 어리둥절해서 그를 바라본다.

“피카소와 모네, 르누아르, 고흐는 인상파였고 마티스와 샤갈은 야수파•••그런데 동 시대를 살던 모딜리아니는 사조를 거부했죠. 사조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동행이 없는 외로운 항해와 같죠•••모딜리아니는 사조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화법을 창조한 외로운 화가였습니다.”

변론의 클라이맥스로 올라가는 변호사처럼 현 교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자 보십시오. 긴 목에 이 비대칭의 얼굴, 선이 분명한 얼굴에 꿈꾸듯 한 눈동자 없는 눈, 채워질 수 없는 공허를 표현하려고 몸부림치는 화가의 영혼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화가의 영혼을 느껴보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일행에게 현 교수가 다음 질문을 던진다.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은 아몬드 같은 이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우물쭈물 서로의 얼굴만 바라본다. 학생들 수준에 실망한 현교수가 강의의 방향을 튼다.

“모딜리아니는 생전에 자신을 몰라주는 무식쟁이들에게 작품을 헐값에 팔아 생계를 연명했던 가난한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림이 비싼 값에 팔리기 시작했죠. 에•••지난 2015년 11월에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서 중국 갑부가 모딜리아니의 ⌜누어있는 누드⌟를 1억 7,040만 달러에 낙찰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한화로 치면 1,970억 원이 넘는 가격인데, 이는 세계 미술품 경매 사상 2위에 해당하는 높은 가격이었죠. 모딜리아니는 생전에 자기 그림으로 단돈 천만 원도 벌어 본 적이 없었는데••••••.”

현 교수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일행 속에서 한숨 섞인 반응이 흘러나온다. 기가 막혀. 말도 안 돼.

“선생님.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봅니다. 피카소 모네 고흐의 그림은 미술관마다 걸려있었는데요.”

여행기간 동안 내내 맘 좋은 미소만 짓던 철수 씨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좋은 질문입니다. 그건,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개인소장이 많기 때문입니다. 서른여섯 살에 요절한 화가라 작품도 많지 않지만•••한번 사 간 소장품을 독점하려는 부자들의 속성 때문이기도 하죠.”

또 누군가가 질문을 했고 현 교수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여자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아까부터 그림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이 그녀의 온 몸을 휘감고 있어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여자는 그 빛에 이끌려 초상화를 향해 한발 한발 걸어갔다. 전시공간과 관람공간을 구분해 놓은 안전 바가 무릎에 걸려 여자의 몸이 기우뚱해졌다. 금색 차단 봉이 대리석 바닥에 쓰러지며 ‘쨍그렁’ 소리가 났다. 멈춰요. 누군가 소리쳤지만 여자는 멈추지 않았다. 미소 짓고 있는 ‘잔 에뷔테른’을 향하여 걸어갔다.

남프랑스의 해변도시. 크림색 벽과 브라운색 뾰족 지붕위로 늦가을의 주홍빛 노을이 내려앉고 있다. 길게 뻗은 좁은 언덕길을 노란 스웨터에 검정색 숄을 두른 젊은 여자가 걸어 올라가고 있다. 가슴에 안고 있는 종이봉지가 무거운지 가끔씩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린다. 커다란 삼각 머플러로 어깨를 감싼 여자의 배가 불룩하다. 여자가 멈춰 서서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 짓는다. 주황색 담쟁이가 올라간 작은 집 앞에서 여자가 걸음을 멈춘다. 빨간색 나무문을 밀고 들어간다. 이젤 앞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본다.

“잔, 전쟁 소식은 좀 들었어?”

“독일 군이 아직 파리에는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에요.”

여자가 종이 봉지에서 식료품을 꺼내 탁자 위에 놓는다. 빵 치즈 우유, 핑크색 포도주 한 병.

“로제 와인까지 샀어?” 남자의 얼굴이 밝아진다.

오늘 즈모르프스키 부인이 그림 값보다 돈을 조금 더 주었어요. 그래서 오랜 만에 호사하려 구요.”

여자가 주머니에서 남은 돈을 꺼내 깡통 속에 떨어뜨린다. 쨍그렁 소리가 방안에 경쾌하게 울린다.

“언제 파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파리가 그리워.” 남자가 한숨을 쉰다.

“여보, 파리는 추워요. 지금쯤은 눈이 올지도 몰라요. 당신 결핵이 다 나을 때까지 여기 니스에서 지내요.“

“그렇지만 잔, 나는 몽마르뜨와 몽파르나스가 그리워.”

여자가 남자 앞에 놓여있는 캔버스를 바라본다. 캔버스에는 노란 스웨터를 입은 여인의 초상화가 거의 완성되어 있다. 스웨터 속 여인의 배가 둥싯하니 부풀어 있다.

“모디, 당신은 왜 내 눈을 그리지 않나요?”

“어•••그거•••당신의 영혼을 알고 난 뒤에 그때 그리려고.”

여자가 남자의 가슴으로 파고든다. 남자가 기침을 한다. 여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본다.

“괜찮아. 그래도 니스로 온 후에는 각혈은 하지 않았잖아?”

두 사람이 포옹한다. 뱃속에서 아기가 노는지 여자가 오른손을 배에 얹는다.남자가 여자의 손위에 자기 손을 포갠다.

 

맑고 서늘한 파리의 3월. 몽파르나스 언덕 위에 있는 카페 노통드. 쇼미에르 미술학교에 다니는 잔이 친구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다. 잔이 창가 쪽을 자주 본다. 창가에 앉은 젊은 남자가 하늘색 표지의 스케치 북을 펴고 목탄으로 스케치를 하고 있다. 남자도 잔을 바라본다. 남자의 눈길이 몸에 닫을 때마다 잔의 귓불이 붉어진다.

며칠 후, 잔이 미술학교 수업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갔을 때, 그 남자가 층계 아래에 서 있다. 놀라는 척 했지만 잔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남자가 매일 찾아와 교실 창문으로 자신을 훔쳐보고 있었다는 걸.

“마드모아젤, 제 모델이 되어주십시오.”

남자가 서툰 프랑스어로 말한다. 이탈리아 억양이 강하게 배어있는 촌스런 프랑스어다. 목소리에 색을 입힌다면 저것은 투명한 갈색. 잔이 눈을 깜박인다. 저 남자의 눈빛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 그런데 프랑스어로는 해석할 수 없네. 잔은 남자에게 빠져들었다.

“마드모아젤, 당신을 내 캔버스에 담고 싶습니다.”

갈색 목소리가 추운 듯 떨린다.

“저는 모델료가 무척 비싼데요.”

잔이 파리 상류층의 세련된 프랑스어로 대답했다. 거절의 의미로 해석한 듯 남자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발로 땅을 툭툭 찬다. 그때 잔이 남자의 어깨에 살짝 기대면서 고쳐 말했다.

“무슈, 당신의 모델이 되어드리겠어요.”

순간, 잔의 얼굴이 빨개졌다. 한 번도 남자에게 해본 적이 없는 자신의 말과 행동에 놀라서. 남자가 머뭇머뭇 잔의 손을 잡는다. 손이 불덩어리 같이 뜨겁다. 순간, 잔은 자신의 몸속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은 몽파르나스 쇼미에르 골목길에 있는 낡은 이층 방을 얻어 아틀리에 겸 살림방을 차렸다.

모딜리아니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넓고 반듯한 이마, 깊고 그윽한 눈매, 한 벌 뿐인 청색 비로드 정장에 붉은색 나비넥타이를 맨 모딜리아니의 모습은 눈부셨다. 파리의 귀공자라는 별명에 잘 어울렸다. 잔은 행복했다. 전시회가 끝나면 돈이 들어올 것 같았다. 밀린 방세도 내고 석탄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구 웃음이 나왔다. 만삭의 몸이었지만 열심히 남편의 심부름을 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전시회장으로 경찰이 들이닥쳤다.

“누가 이따위 추잡한 그림을 내걸었어?” 경찰이 벽에 걸린 ⌜누어있는 나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경관님. 그건 예술입니다“ 모딜리아니가 나서서 말했다.

“예술? 예술 좋아하네. 미풍양속이나 해치는 저런 게 무슨 예술이야? 당장 떼어 내!”

개인전은 순식간에 철거되었다. 몽마르뜨와 몽파르나스에 그 소식이 쫘악 퍼졌다. 뜸하게 들어오던 주문도 뚝 끊겼다. 곧 첫 아이가 태어났지만, 키울 수가 없어서 자선단체가 운영하는 유모 집에 맡겨야 했다.

모딜리아니는 자포자기했다. 거리에 나가 관광객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푼돈을 받으면 술과 바꿔 먹고 길거리에 뒹굴었다. 기별을 받고 잔이 달려가면 그가 소리쳤다.

“잔, 그냥 내버려 둬! 죽게 내버려 둬!”

그럴 때마다 잔이 남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모디, 제발 당신의 그 눈부신 재능만은 썩히지 말아요. 천재는 그럴 의무가 있어요.”

그러면 모딜리아니는 벌떡 일어나 잔의 뒤를 따라 아틀리에로 돌아왔다.

파리의 추위는 냉혹했다. 난로를 피울 돈조차 떨어지자 좁은 작업실 안에 서리가 내렸다. 하루 종일 각혈을 하고 난 모딜리아니가 말했다.

“잔, 이제는 당신의 눈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아.”

잔은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입었던 검정 원피스를 입고 의자에 앉았다. 모딜리아니는 그날 눈동자가 있는 잔의 초상화를 두 장 그렸다. 똑바로 앉아 앞을 보는 앞모습 한 장과 살짝 비스듬한 옆모습 한 장을. 그날 잔은 초상화 속의 반짝이는 자신의 파란 눈동자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여보, 죽어서도 당신 모델이 돼 줄게 요.”

잔이 모딜리아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임신 9개월의 잔에게 오한이 찾아왔다. 잔은 덜덜 떨며 친정으로 갔다. 그날 밤에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떴다. 기별을 받고 잔이 달려갔을 때, 남편은 자선병원 시체 안치소에 누어있었다. 잔은 남편의 푸른 입술에 자신의 붉은 입술을 포개며 결심했다. 남편에게 한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음 날 아침. 파리의 하늘은 희부옇고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잔은 태기를 느꼈다. 두 번 째 아기가 세상에 나올 준비를 마친 듯 했다. 그녀는 친정집 6층 아파트의 창문을 열었다. 아미오길 8번지. 고급 주택가의 붉은 지붕들이 끝없이 펼쳐지고, 골목길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지나가고 있었다. 지난 3년을 뒤돌아보았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잔은 의자를 놓고 창틀에 올라섰다. 현기증이 났다. 뱃속의 아기가 놀라서 맹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뛰어 내렸다. 아가야, 놀라지 마. 아빠에게 가는 길이야. 뱃속의 아기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울면서 또 말했다. 잔 모딜리아니, 미안해. 유모에게 맡긴 첫 아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여자는 중정에서 쏟아지는 뽀얀 빛이 얼굴을 어루만지는 속에서 눈을 떴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 윤곽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노부인의 얼굴과 미술교사의 얼굴 뒤로 수많은 눈동자들이 보였다. 미술관이구나. 여자는 회랑에 놓인 긴 가죽 의자에 누워 생각했다.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야 해•••거대한 슬픔이 밀려 왔다. 눈물이 흘러나와 귓바퀴를 돌아 뒷머리를 적셨다.

호텔로 돌아오는 택시에서 옆자리에 앉은 미술교사가 오래전 청량음료 시엠송을 흥얼거리더니, 여자에게 귓속말을 했다.

“맞죠? 그렇죠? 아까 누어있을 때 알아봤어요.”

여자는 대답 대신 그녀의 투박한 손을 잡아주었다.

 

“잠깐 뵐 수 있을까요? 호텔 1층에 있는 카페인데요.”

그날 밤, 현 교수가 전화를 했다. 여자는 이미 화장도 지우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서울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없을 것 같기도 하고•••그래서 한 잔 하고 싶어서요.”

여자는 일행의 스케줄에 차질을 준 점이 미안해서 사과하는 의미에서 카페로 내려갔다. 붉은 등불이 켜진 카페의 구석 테이블에 도원결의라도 하듯 머리를 모으고 있는 세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여자가 다가가자 세 남자가 동시에 얼굴을 들고 활짝 웃는다. 이미 눈자위가 불그스레하다.

“오늘 미술관에서 어떻게 된 일이에요?” 여자가 의자에 앉자마자 김 작가가 궁금해서 죽겠다는 듯 묻는다.

“혹시•••타임머신 타고 시간여행이라도 다녀오신 겁니까? 자꾸 모디를 부르던데••••••.”

“자자. 무슨 소리야? 이 사람 취했군.” 현 교수가 김 작가를 눈짓으로 저지한다.

“현 선생님 괜찮아요. 누구나 이상한 구석이 좀 있지 않나요?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김 작가님도 그런 것 같네요.”

“역시••••••.” 현 교수가 ‘엄지 척’을 하며 여자에게 윙크를 보낸다.

“여사님. 나 말입니다, 50평생 못 깨달았던 것을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김 작가 끈질기게 파고든다.

“그게 뭐냐면 말입니다. 모든 그림에는 소설이 한편씩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 소설이 한편씩 숨어 있는 것처럼 요.”

여자는 김 작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척 했다. 김 작가가 계속했다.

“우리 현 교수께서도 아까부터 자꾸 알송달송 한 소리를 하네요. 자기는 뭐 전생에 파리의 화상쯤 되는 것 같다나요? 하긴 모딜리아니의 책을 세권씩이나 냈고 자칭 타칭 모딜리아니 전문가라고 알려진 몸이시니까•••모딜리아니를 좋아했던 즈모르프스키 화상쯤 될지도 모르지요. 어때요? 동의하세요?”

“••••••.” 여자는 대답하기 싫었다.

“현 교수가 즈모르프스키였던 것 같아요? 아닌 것 같아요?”

김 작가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여자는 김 작가의 시선을 피해 벽에 걸린 ‘공연하는 비틀즈’의 대형 사진으로 눈을 옮겼다. 취한 듯 가장하는 김 작가의 말 속에서 ‘당신은 모딜리아니와 인연이 있지요? 그렇죠?’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비밀을 들킨 것 같아 여자는 일어섰다.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성형외과 원장이 취한 듯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한다.

“여러분, 세계는 지금 ‘말티즈 형’ 얼굴이 대세입니다. 거 왜, 어맨다 사이프리드처럼 눈이 입보다 크고, 대책 없이 귀여운 얼굴 말입니다. 걸 그룹도 모두 그 얼굴이지요. 흥, 내가 말티즈 형으로 수술해 준 여자가 우리나라에 천명도 넘어요. 흐흐•••그 공로로 강남의 건물주도 됐지만요•••그런데 오늘 깨달은 게 있어요. 큭•••이제 곧 ‘말티즈 형’은 지고, ‘잔 에뷔테른 형’이 뜨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 이거 다, 아름답고 우아하신 우리 차은지 여사님 덕분이지요. 흐흐, 그게 이번 여행에서 제가 얻은 수확입니다.”

“그럼 이번 여행에서 제일 큰 소득을 얻은 건 곽 원장이시네. 사업 아이템까지 얻었으니까.” 현 교수가 성형외과 의사의 어깨를 툭 친다.

"그래도 그림 속에 소설이 들어있다는 김 작가님의 혜안보다는 한 수 아래죠. 그림 속에 소설이 들어있다! 차암 멋진 말이었어. 내 인정하지, 인정해. 작가들은•••흐흐 개 새끼들이야. 존경하는 개 새끼••••••.“

의사가 김 작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말티즈처럼 귀여운 표정을 짓는다.

엘리베이터 숫자판에 불이 들어오고 불빛이 하늘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을 때 현 교수가 여자에게 말했다.

“내년이 모딜리아니 사망 100주년이 되는 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는 모딜리아니의 작품 순례를 구상 했습니다. 음•••중국갑부가 소장하고 있는 ⌜누워있는 나부⌟와 영국 백작이 소장하고 있는 ⌜커다란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홍콩스타가 가지고 있는 ⌜어깨를 드러낸 잔⌟ 등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작품들을 찾아다닐 계획인데•••동행해 주실 거죠?”

이미 의견일치를 본 듯 김 작가와 곽 원장이 웃음 기득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자신의 룸이 있는 32층에서 내릴 때, 칭찬을 기다리는 소년의 얼굴을 한 채,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세 명의 중년 남자에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