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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 시, 두 가지 착각 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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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책 아이콘문학 이야기 창간호 2025년 4월 1호

하필 바지락이 있다. 다행히 바지락이 있다고 해야 하나. 남편이 좋아하는 미역국은 소고기를 넣어 끓인 국이다. 눈을 씻고 찾아도 냉장고에 소고기 같은 건 없다(장을 보지 않았으니 없는 게 당연하다). 바지락마저 없다면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미역국을 끓여야 했을까, 할 수 없이 남편의 생일 미역국을 건너뛰어도 좋았을까.

오늘 새벽 예정보다 이틀이나 먼저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왔다. 지난밤 자정이 넘어 잠든 내가 남편이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를 놓친 모양이다. 인기척이 느껴져 눈을 뜨니 남편이 재킷을 막 벗어 옷걸이에 거는 중이다. 많이 피곤했나 보구나, 다정하다고 해도 무방할 목소리였다. 일이 일찍 끝나서 그냥 올라왔어, 남편의 대답은 빨랐다. 어떻게 이렇게 일찍 올라왔냐는 질문은 뱉을 필요가 없어졌다. 자, 자라구 어서 자, 침대에서 머리를 일으키려는 나를 향해 남편이 손사래를 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남편이 존재한다. 다정한 남편과 그렇지 않은 남편. 음.. 이건 분명 다정한 남편 쪽이다.

잠옷을 갈아입은 남편이 침대로 들어와 곧 코 고는 소리를 낸다. 곤했겠지, 이 시각에 도착한 걸 보면 자정 넘어 출발했다는 건데 회사에 급한 일이 있는 건가. 그건 그렇고 오늘이 남편 생일이다. 출장지에서 생일을 보내게 생겼다고 투정하듯 얘기하는 남편에게 갖고 싶은 게 있나 물었다. 딱히 선물하겠다는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필요한 게 없다고 말할 확률이 85퍼센트라고 생각했다) 의외였다. 가볍게 입을 여름 셔츠를 사 달라고 했다. 지난 주말 집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를 먹을 때 선물을 건넸다. 열어보라는 눈짓을 하자 남편이 포장지를 뜯었다. 장식용 리본이 안 풀리자 남편이 투덜댔다. 내가 종이 박스 위로 가볍게 리본을 벗겨주니 남편이 멋쩍게 웃었다. 백화점 점원에게 선물용 포장을 부탁했더니 좀 과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고작해야 반팔 버튼다운 셔츠인데 박스도 크고 붉은 리본도 튀었다. 어쨌든 연푸른색 셔츠를 보고 남편이 좋네, 하면서 웃었던 것 같다. 굳이 얘기하자면 싫지도 좋지도 않은 웃음이었다.

생일 아침에 토스트와 커피를 먹으면 안 된다는 법도 없지 않나. 지난주에 이미 선물도 주고 외식도 했단 말이지. 미역이야 있지만 무얼 넣어 미역국을 끓인다는 거지? 생일 아침에는 밥 거르지 말게 하라는 시어머니 얘기가 아니라도 10년 넘게 생일 미역국 정도는 끓여냈다. 내심 이번 남편 생일에는 아침 일찍 미역국 끓여 상 차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쾌재를 불렀다. 미역국을 끓여주지 않는다고 남편이 화 낼 일이야 없겠지만 습관이란 게 이토록 무서워 하던 일을 이유 없이 안 하기도 참 이상하다. 무심한 남편이지만 언젠가 친구 부부에게 아내가 생일이면 거르지 않고 정성껏 아침밥을 차려준다는 말을 자랑처럼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사정이 좀 다른 건 사실이다. 예정에 없이 남편이 일찍 돌아왔다는 것이지. 그것도 꼭두새벽에.

잠이 한참 달아나버려 돌아올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이불을 걷고 발딱 일어났다. 비장한(나도 모르게 그리되었다) 걸음으로 부엌에 갔다. 냉장고에 달렸다. 전적으로 냉장고에 맡기기로 한다. 무언가 나오면 미역국을 끓이고 아니면 마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다니.

냉동실을 뒤지다 보니 하얀 비닐봉지에 담긴 바지락이 보인다. 아, 탄식 같은 한 마디가 새어 나온다. 이런 게 있었구나. 언제 산 것인지도 모를 꽁꽁 언 바지락을 꺼내니 돌덩이보다 단단하다. 게임 끝.

미역을 불리고 해동시킨 바지락을 씻어 소쿠리에 담아두었다. 젖은 손을 대충 앞치마로 쓱쓱 비비고 스마트폰에 다운 받은 어플로 FM라디오를 켰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 라는 그리스 노래가 흐르고 있다. 국냄비에 물기가 빠진 바지락과 미역을 넣어 국간장과 참기름을 두르고 볶았다. 아그네스 발차의 흐느끼는 듯한 음성이 미역 볶아지는 소리에 묻혀 빗소리로 들렸다. 적당히 볶은 미역에 잠기도록 물을 붓고 뚜껑을 덮었다. 부엌창을 열어 손을 내밀어보니 비가 내리고 있지는 않다. 식탁 의자를 빼고 앉아 다글다글 소리를 내며 끓는 국을 지켜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생일상을 차리기로 했는데 달랑 미역국만 올릴 수는 없잖아. 냉장고를 열어 찬거리를 살펴봐야 한다. 새송이 버섯과 애호박이 당첨되었다. 버섯으로 나물 흉내를 내고 애호박을 얇게 썰어 전을 부치면 생일상 분위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급하게 하느라 전이 예쁘지 않다. 접시에 호박전을 올리고, 조그만 양념장 종지도 놓았다. 버섯나물과 몇 가지 밑반찬을 곁들였다. 남편을 깨우기 위해 안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남편은 없고 헝클어진 이불만 남았다. 세찬 빗소리가 욕실에서 들린다. 씻어요? 욕실 문을 두드리며 남편을 부른다. 샤워기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두 번을 더 두드리고서야 남편이 대답한다. 남편은 언제 일어난 것일까, 아침잠이 많아 5분만 더, 3분만 더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인데. 게다가 오늘은 새벽에 도착해 3시간도 채 못 잤을 텐데.

남편이 입고 나갈 옷들을 침대에 올려두고 부엌으로 나간다. 가스렌지 불을 켜고 식어버린 미역국을 데운다. 밥을 담아 식탁에 놓으니 남편이 나온다. 말없이 식탁에 앉은 남편이 미역국이 나오길 기다리는 눈치다. 남편은 오늘 당연히 미역국을 먹게 될 줄 알았다는 뜻일까. 예정에 없이 한마디 언질도 없이 생일날 새벽에 도착한 사람의 기대치고는 좀 뻔뻔하다. 알맞게 데워진 미역국을 남편 앞에 놓아주고 내 것도 담는다. 언제 미역국을 끓였나, 깜짝 놀라는 시늉까지는 아니라도 무언가 비슷한 반응이라도 있어야 할 테지만 기대가 컸다. 장을 못 봐서 소고기 미역국을 못 끓였어, 기다리다 못한 내가 입을 열었다. 알아, 먹어보면 알지, 남편은 소고기가 아니어서 싫다는 내색도 안 했지만 그렇다고 고마운 얼굴도 아니다. 옆구리를 찔러봤자 절 받기는 틀렸구나 싶어 나는 마지못한 축하를 했다. 생일 축하해. 미역국을 뜨다 말고 나를 보며 남편이 축하는 무슨.. 애들도 아니고. 남편은 간단히 고맙다고 한마디 하면 될 걸 애써 시큰둥한 답을 한다. 축하는 애들만 받는 것이 아니지만 남편이 많이 피곤해서 심하게 무심해진 것으로 친다.

남편이 출근하고 반도 넘게 남긴 그의 국그릇을 비우며 괜한 수선을 피웠나 생각한다. 남편이 미역국을 기대하지 않았던 게 분명해. 식탁을 치우고 그릇들을 씻어 식기 건조기에 놓았다. 이왕 끓였으니 먹어주는 것 같은 남편 표정이 떠올라 행주를 짜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앙, 소리가 나게 행주를 비틀어 짜서 널었다.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으니 남은 미역국은 모두 내 차지다.

안방에는 허물 벗듯 벗어던진 잠옷이며 수건이 남편의 동선을 그대로 보여준다. 침대에 걸쳐진 잠옷을 옷걸이에 걸고 축축한 수건은 빨래 바구니에 넣는다. 화장대 위 스킨이 뚜껑이 열린 채로 놓인 걸 보고 고개가 갸웃해진다. 무엇이 그리 바빴나. 비교적 꼼꼼한 편인 그가 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뚜껑을 닫아 제자리에 두고 머리빗이며 헤어 제품들도 정리한다. 티슈를 뽑아 화장대 위 먼지를 훔치다 말고 잠깐 골똘해진다. 무언지 불편한 이 기분에 대해 정리해 봐야 할 것 같다. 화가 나거나 서운한 것일까. 무엇 때문에 내가 화가 났지? 예고도 없이 새벽에 도착해서? 그것 때문이라면 화난 감정하고는 다르다. 끓이지 않아도 될 미역국에 대해 고민해야 해서? 미역국을 끓였는데 고마워하지 않아서? 그건 아무래도 조금은 서운했다고 해야겠다. 내가 서운한 게 맞구나. 이게 서운한 감정이라는 거지?

 

대학 4학년 겨울 방학에 나와 지혜와 세경, 우리 셋은 연말을 따뜻한 곳에서 보내기로 계획을 세웠다. 한 달 전에 이미 특가로 나온 방콕행 비행기 표를 사 놓았고 풀장이 딸린 리조트 호텔도 예약해 두었다. 사정이 나쁘지 않은 지혜는 부모님에게 받은 용돈으로 회비를 충당했지만 나와 세경은 한 학기 꼬박 일주일에 두 번 아르바이트를 해서 여행 경비를 모았다. 세경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손목이 시리게 스쿱으로 아이스크림을 퍼야 했다. 나도 물론 학원에서 고등학생 아이들 국어 시험지를 채점하느라 눈알이 뱅글뱅글 돌 지경이었다.

지혜는 떠나기 두 주 전에 방송국 보조 작가로 지원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일이 하필 우리가 방콕에 있게 될 날이었다. 거의 울 뻔한 얼굴로(좋은 건지 아쉬운 건지) 그 소식을 전하는 지혜에게 우리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나 그냥 방콕 갈까? 면접 본다고 꼭 합격하는 것도 아니잖아”

“안 돼(세경과 내가 그야말로 동시에)”

축하는 이르지만 잘 될 거라고, 다음에 꼭 같이 가자고 했다. 우리가 선물 사 올 테니 면접 잘 보라는 말로 지혜 입을 막았다. 세경과 나는 둘이서 여행 준비를 했고, 세경은 수영복을 두 개나 샀다. 출발일이 일주일이나 남았지만 우리 둘은 이미 여행 가방을 다 싸 두었다. 이틀 후 지혜에게 전화가 걸려왔을 때는 잠깐 망설이다 받았다. 얘가 또 뭐라고 투정을 부리려나, 하고. 지혜 목소리는 심각했고 내용인즉슨 세경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였다. 세경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순간 방콕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지혜에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지혜와 시간을 맞춰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빈소로 향했다.

 

방콕은 결국 혼자 가게 되었다. 싸게 구하느라 환불이 되지 않는 호텔을 예약 한데다 특가로 나온 비행기 표도 포기하기 아까웠다. 세경은 할머니 상 중에도 새로 산 수영복을 내게 챙겨주며 가지고 가라고 했고 지혜는 향기가 좋은 입욕제(우리가 함께 가면 쓰려고 샀다고 했다)를 주면서 응원했다. 막중한 임무를 맡기듯 그녀들은 한가지씩 내 손에 쥐어주고 나를 방콕으로 보냈다.

떠나기 전날 밤까지 망설였다. 혼자 가는 여행이 처음이다 보니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출발일이 다가올수록 낯선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부정적인 경우의 수가 머리에서 끝도 없이 생산되었다. 여권이나 지갑을 도둑 맞고, 바가지 택시 요금을 내게 된다거나 하는 것쯤은 그나마 들어줄 만한 내용이다. 하다하다 심지어 넘어져서 이빨이라도 깨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내용은 내가 생각해도 터무니없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지혜와 세경은 내가 그렇게 창의적인 사람인지 몰랐다며 탄복할 지경이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항공사 카운터에 짐을 보내고 티켓을 받았다. 부탁한 창쪽 자리와 탑승구, 탑승 시각을 확인시켜 주는 항공사 직원의 나긋한 목소리가 갑자기 설렘을 부추겼다. 단체 여행객들이 선 긴 줄을 빠져나와 전화기 로밍 신청을 하고, 약국에 들러 소화제와 두통약을 샀다. 상비약은 이미 준비해서 수트케이스에 넣어 짐으로 보냈지만, 기내에서 필요할 것 같아(예민한 위장을 소유한 사람의 자세라고 할까) 구입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들어가니 다른 세상에 진입한 느낌이 들었다. 몇 미터 거리를 사이에 두고 이토록 다른 공기라니, 기분이 확연히 달라진 내가 벌써 낯설었다. 거리 양쪽에 늘어선 면세점을 둘러보다 엄마에게 줄 향수 한 병을 골랐다. 탑승구 쪽을 향해 걷는데 통통통 공이 하나 굴러왔다. 눈이 커다란 외국 남자아이가 뒤따라 뛰어왔다. 내 앞으로 다가온 공을 가볍게 아이 쪽으로 차 주었다. 땡큐, 아이의 수줍은 웃음이 이국적이다.

탑승이 시작되었고 좌석 번호를 확인하고 자리에 앉아 벨트를 메고 창밖을 보니 어둠 속에서 비행기 날개가 보였다. 휴대폰으로 날개를 찍어 세경과 지혜에게 보내고 전화기를 비행기 모드로 바꾸는 사이 한 남자가 백팩을 머리 위 선반에 올리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몇 분 후에 다시 일어나 재킷을 벗어 접은 다음 선반에 올렸다. 곧 이륙을 알리는 스튜어디스의 안내 방송이 들렸다

안전벨트 싸인이 꺼지고 기내식 서비스가 시작되자 기내가 술렁이기 시작했고 나도 덩달아 아이처럼 들떴다. 메뉴라고 해봐야 고작 두 가지이지만 내 차례가 오기 전까지 적어도 5분은 고민했다. 닭고기 요리를 먹을까 비빔밥을 먹을까. 세경과 같이 왔다면 한 가지씩 먹어도 좋았을 텐데. 닭고기와 맥주 한 캔을 주문했다. 밍밍한 소스에 버무려진 그저그런 닭고기였지만 맛과는 상관없이 기분으로 먹어치웠다. 하늘 위의 식사,라는 제목을 붙이고 맥주도 탈탈 털어 깔끔히 마셨다. 덕분에, 다른 승객들 식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요의가 느껴졌다. 옆좌석 남자는 닭고기를 시켜 반도 못 먹고 빵과 요거트만 먹은 눈치다. 식사가 끝나고 기내용 면세품 판매가 시작되었다. 남자가 주문한 상품을 받는 사이 나는 화장실에 다녀왔다. 키가 큰 남자가 다리를 한껏 옆으로 모아 내가 나가기 쉽게 만들어주었고, 돌아와 앉을 때는 미안하게도 아예 복도에 서 있다 내가 들어가길 기다려주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싶으면서도 고맙다는 얘기에 진심을 담느라 나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모았다.

식사와 면세품 판매가 끝나자 승객들이 쉬도록 소등해서 기내가 어두웠다. 별을 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창밖에는 비행기 날개에서 깜박이는 불빛이 별들을 대신해서 아름다웠다. 독서등을 켜고 수첩을 꺼냈다. 무엇이라도 기록하고 싶었고 기억하고 싶었다. 분명 펜을 넣었는데 가방을 아무리 뒤져도 비행기 타기 전에 샀던 소화제와 초콜릿, 손수건, 여행용 책자, 휴대용 화장지 같은 것들만 나왔다. 센티했던 기분이 짜증으로 바뀌는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나 순간적이어서 놀랐다.

“이것 쓰세요.”

남자가 선반에 있는 백팩을 꺼내더니 새것으로 보이는 포장지를 소리 나게 뜯었다. 세 개가 한 묶음인 선물용 볼펜 하나를 내게 건넸다. 말릴 사이도 없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한테 주기 위해 선물용 포장지를 뜯는다는 생각이 없었으므로 말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괜찮아요.”

과장되게 손사래를 치면서 내가 말했다. 사실 좀 당혹스럽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다. 바로 얼마 전에 기내 면세품으로 산 것이 분명해 보였다.

“파일럿이 꿈인 조카 주려고 산건데 생각해 보니 좀 유치한 선물 같아서요. 볼펜이 세 개나 들어있네요. 하나 쓰세요.”

선뜻 내가 받지 못하자 푸른색 비행기 모양 볼펜을 내 손에 강제로 쥐어주다 싶게 넘겼다. 짧은 메모를 하고 볼펜을 돌려주자 남자는 가지라고 했고 더 이상 사양하기도 멋쩍어 비행기 모양 볼펜을 가방에 넣었다. 망설이다 가방 속 초콜릿을 꺼내 건네자 남자는 답례품인가요? 하면서 허허 웃었다. 웃음이 소탈해 싫지 않았다. 방콕에는 혼자 가는지 물었고 나는 지혜와 세경이 떨어져 나가게 된 사연을 짧게 들려주었다. 남자는 별것도 아닌 내 얘기에 유쾌해졌고 별로 고급도 아닌(한국의 아무 편의점에서나 살 수 있는 것이었다) 초콜릿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이 초콜릿 진짜 맛있는데요, 하는 멘트는 역력히 과장이었다. 자신은 체인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사람이고 방콕에 체인점 개설 문제로 관계자와 미팅이 있다고 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비행기는 방콕 수안나폼 공항에 착륙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아 호텔로 가는 택시를 타기 위해 공항 밖으로 나왔다. 간신히 택시 타는 곳을 찾았지만 택시를 탈 수 없었다. 줄을 서는 곳도 없고 손짓을 해 택시를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웠고 불안감에 수트케이스 바퀴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여기 왜 이러고 있어요? 내 초콜릿을 받아 먹었던 남자 목소리가 얼마나 반갑던지. 남자는 무슨 티켓 같은 것을 뽑아오더니 번호순으로 택시를 타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도 전에 내 손에서 전화기를 뺏더니 자신의 번호를 찍었다. 3일 후에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니 그 전에 혹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하라며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공항에서 택시 타는 법도 모르고 헤매기는 했지만 무사히 호텔에 도착했고, 일주일 휴가도 잘 마치고 귀국했다. 남자 도움 따위는 필요 없었고, 귀국해서는 남자를 기억할 일이 없었다. 세경과 지혜는 여행지에서 생길 수 있는 로맨틱한 일을 기대하는 듯했지만 나는 그녀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에게서 전화가 온 건 이듬해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눈발이 날리던 오후였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을지 말지 몇 초쯤 고민했다.

“내 볼펜 돌려주셔야죠?”

여보세요, 하고 내 목소리가 끝나기 바쁘게 되돌아온 말이 볼펜을 돌려달라는 거였다. 이번엔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남자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하는 사이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내일 돌려주세요.”

피치 못할, 이라는 표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다음 날 남자가 문자로 보낸 카페 주소로 푸른색 비행기 볼펜을 가지고 나갔다. 설마 정말로 볼펜을 받겠다고 나를 부른 건 아니겠지만 다행히 여권을 넣어 둔 서랍에 볼펜이 있어서 가지고 갔다. 카페 오후 다섯 시,는 인사동 초입에 있었고 어렵지 않게 찾았다. 오후 다섯 시를 몇 분 남기고 오후 다섯 시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키 큰 남자가 내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듯 창 쪽 자리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볼펜 나 준 거 아니었어요?”

인사 대신 따지듯 묻는 내 질문에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그가 어색함을 감췄다. 우리 둘은 따뜻한 커피를 시켜 대화가 끊길 때마다 두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 입으로 가져갔다. 커피가 식어버려 온기가 없어질 무렵 그가 다시 급하게 물었다.

“오후 다섯 시가 낮이에요 저녁이에요?”

“어두워졌네요, 이렇게 어두운데 낮이라고 하긴 좀 그렇죠.”

창밖을 내다보며 내가 무슨 이런 질문을 하나, 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죠, 저녁 맞죠, 저녁밥 먹으로 갑시다.”

낯선 공기가 불편했던 터라 나도 그를 따라 오후 다섯 시에서 거리로 나왔다. 카페 맞은편 2층 불빛이 따뜻해 보이는 파스타 가게에서 우리는 스파게티와 피자를 맛있게 먹고 헤어졌다. 그 후로 두 해를 더 만나고 그와 나는 부부가 되었다.

 

정오가 지났지만 점심 생각이 없어 커피만 홀짝이다 부엌에 있는 국냄비에 생각이 닿았다. 다른 재료와 달리 미역은 불려서 만들어야 하다 보니 양을 가늠하지 못하면 낭패다. 하필 오늘(사실은 자주) 불린 미역을 보고 양이 많은 것 같아 조금 남길까 하다 마저 끓여버렸다. 버리기는 아깝고 보관하자니 냉장고에 머물다 결국 음식쓰레기통으로 갈 게 뻔했다.

국을 데워 밥을 먹었다. 아침에 먹었던 반찬들이 그대로 식탁에 올랐고 남편만 빠졌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피곤했을 것이다, 잠을 제대로 못 잤으니 입맛이 있을 리도 없을 것이고. 남편이 없는 식탁에서 불현 남편을 소환했다. 급히 올라온 이유가 남편에게 불편한 상황인지도 모르겠고. 최근 그의 태도를 떠올려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편이 요즘 어땠지? 친절한 듯 무심했고 꼼꼼한 듯 덜렁댔다. 남은 국에 밥을 말았다. 아침엔 몰랐는데 이제야 국이 짠 건 기분 탓인가. 어쨌든 요점정리가 끝난 기분으로 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수마트라 원두를 약간 거칠게 갈아 여과지에 흘리지 않게 담아 뜨거운 물을 원을 그리며 정성스레(사실은 시간을 보내야 해서 일부러 느릿느릿) 떨어뜨렸다. 보기 좋게 거품이 만들어졌다. 얼굴을 원두 가까이 가져가서 손바닥 부채질로 향을 코끝까지 전달했다.

몇 주 전에 남편이 수마트라 원두를 가지고 들어온 날은 비가 내렸지. 무얼 사들고 오는 사람이 아닌 데다 원두 같은 건 더구나 무얼 마셔도 그게 그것인 남자다. 커피를 나처럼 즐기지 않고 입맛도 예민한 편이 아니라 그가 커피를 사올 줄 몰랐다. 조그만 스타벅스 쇼핑백에 빗방울이 묻어 있었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남편이 사들고 온 커피 원두를 받아들고 난 잠깐 말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맛있드라구, 재킷을 벗어 내게 건내며 남편이 말했다. 받아 든 옷에서는 눅눅한 비 냄새가 났다. 비 와? 응 갑자기.. 남편이 욕실로 향하며 대답했다. 빗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비가 내린 모양이었다. 갑자기 비가 내렸다는 말이었겠지만 그야말로 남편이 갑자기 홱 돌아서며 빠른 걸음으로 욕실로 사라졌다. 쇼핑백에서 원두를 꺼내 찬장에 두었다. 아니,, 갑자기 화장실이 급하단 소리였나?? 거실 창문을 열어 손을 내밀어보니 비는 멎었고 바닥은 젖어있었다. 갑자기 비가 내렸었구나, 혼잣말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즐기고도 미용실 예약시간이 남았다. 어쩐 일로 남편이 수마트라 원두를 사왔던 걸까.

 

미용사가 내주는 가운을 걸치고 안내받은 자리에 가서 앉았다. 검은색 머리가 답답해 몇 달 전 갈색으로 톤을 낮춰 염색을 했는데 이게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매달 자라는 머리카락에 뿌리염색을 해 주어야 하니 한 달에 한 번은 미용실을 찾게 되었다.

낯이 익은 미용사가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얼굴이 좀 야위신 것 같은데요? 하면서 거울에 비친 내 눈을 뚜렷이 응시할 때는 우리가 그토록 가까운 사이였나, 싶어 잠깐 대답이 궁하다. 그렇지 않은데요, 라고 하자니 지나친 친절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고, 그렇다, 야위었다고 하자니 너무나 멀쩡히(아니 오히려 조금 살이 붙었다) 그렇지 않아서 내가 민망하다. 다행히, 미용사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무얼 마시겠나 묻는다. 오렌지 주스 주세요. 여자의 질문이 썩 맘에 들어 잽싸게 대답했다.

가뭄이 심해서 큰일이에요, 염색제를 용기에 담아와 열심히 저으면서 미용사가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어젯밤에 비가 오지 않았나요? 아, 남부 지방요. 미용사가 다시 거울로 나를 보며 말했다. 수마트라 원두가 담긴 스타벅스 쇼핑백에 물기가 묻어 있던 게 떠올랐다. 내 대답이 조금은 성의 없었다는 생각(사실 그녀의 질문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에 네 맞아요 비가 와야 할 텐데... 건성으로 말끝을 흐렸다. 남부 도시의 어느 아파트에서는 빨래를 모아서 한 번에 세탁기를 돌려달라고 부탁하는 방송을 할 정도라고 했다. 미용사는 내 반응이 시원찮은지 더 이상 가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염색용 붓으로 약제를 꼼꼼히 발라주고는 잡지가 필요한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두꺼운 여성잡지를 무릎에 놓아주었다. 잡지를 몇 장 넘기기도 전에 졸음이 밀려와 고개가 툭 떨어졌다.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하고 잡지를 다시 넘겼다. 몸매를 보정하는 속옷이 나오고 주름을 없애는 화장품이, 여름 메이크업에 필요한 색조 화장품들을 보다 스륵 눈이 감겼다. 잡지를 덮고 거울을 보았다. 머리가 커다란 우주인 같은 여자가 거울에 있다. 비닐 가방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모습에 웃음이 나서 큭, 웃고 났더니 비로소 잠이 깬다. 할 일이라고는 없어 덮었던 잡지를 다시 펼쳤다. 아무곳이나 펼쳐서 넘기다 보니 샐러드와 와인이 놓인 식탁에 눈길이 갔다. 와인 잔에 담긴 와인과 치즈와 연어가 올라간 초록색 채소의 대비가 싱그럽다.

미용사가 다가와 우주인 머리 같은 헤어캡을 벗기고 샴푸실로 나를 안내했다. 머리를 헹궈주는 미용사의 손길이 어찌나 힘차던지 거품이 이마에 튀어 여러 번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오늘따라 에너지가 넘치는(지난번에도 손길이 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미용사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친친 감싸주며 수고하셨다는 말로 샴푸가 끝났음을 알렸다. 아닌 게 아니라 수고한 느낌이 들어 휴, 한숨이 나왔다. 자리에 앉자 머리를 말려주면서 그녀는 다시 가뭄을 걱정했다. 10년만에 최악의 가뭄이래요, 아.. 네... 우리나라가 물 부족 국가라네요, 아.. 네.. 내 대답이 시큰둥하다고 느꼈는지 그녀는 더 이상 거울에서 나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대신 헤어드라이어 두 개를 한 손에 들고 젖은 내 머리를 능숙하게 말렸다. 그녀가 무슨 말인가를 하는 것도 같았지만 드라이어 소리에 묻혀 내 귀에 닿지 않았다.

 

늦겠다던 남편이 아홉 시를 갓 넘기고 돌아왔다. 수입 맥주 네 캔이 담긴 검은 색 비닐봉지를 내 손에 안기며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 맥주나 한 잔 하자,고 했다. 마땅히 안주가 없어 치즈와 비스킷 몇 조각을 맥주와 함께 소파 테이블에 준비했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남편이 소파에 앉아 캔 하나를 따서 내게 건네고 또 하나는 자신이 마셨다. 생일인데 건배는 해야지, 하는 내 말에 마지못해 마시던 맥주캔을 부딪치며 웃었다. 아니 웃는 것 같았다. 거푸 두 캔을 마시더니 먼저 들어가 자겠다고 일어났다. 나는 반이나 남은 맥주를 마저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사실 맥주가 당기는 날은 아니었다) 망설이다 죽 들이켜는 것으로 김빠진 고민의 종지부를 찍었다.

숨소리가 고른 걸 보니 남편이 잠든 것 같아 조심히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 누웠다. 잠든 줄 알았던 남편이 급히 내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잠옷 위로 내 가슴을 만지는 남편의 손길이 다급해 당혹스러웠다. 사랑을 나누기 전에 느껴지는 낌새라고 할까 어떤 분위기 같은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기습적인 남편의 태도에 적잖이 놀라서 몸을 비틀어 남편의 손길을 살짝 거부하는 몸짓을 보였으나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그의 숨소리는 이미 거칠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할수록 그는 광마처럼 날뛰었다. 제압하듯 내 위에서 흥분하는 그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나는 저항하는 것을 그만두고 눈을 감아버렸다. 전희도 없이 전쟁 같은 행위를 마치고 남편도 실신하듯 늘어졌다. 일어나 옷을 찾아 입으려는 내게 남편이 불을 켜지 말아 달라고 했다. 숨죽이고 나도 가만 침대에 걸터앉았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남편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이렇게 미안하다고 말해서 미안하다, 남편은 말을 잇지 못하고 울었다.

눈을 떠보니 남편은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 말간 해가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침실을 밝혔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잠옷 단추를 보니 간밤에 일어난 일들이 꿈이 아닌 게 확실해졌다.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오늘 무슨 일인가를 하기로 한 게 있는지 떠올렸다. 오후에 미용실 예약이 있고, 도서관에 반납할 책이 네 권, 밀린 세탁물 맡기기, 정수기 관리원이 필터 교체하러 다섯 시 방문 예정. 이것 들 중 무엇을 안 해도 되는지 생각해 보았다. 모두 다 안 해도 되는 것들이어서 오히려 김이 샜다. 그렇다면 모두 다 하기로 했다.

침대를 정리하고 잠옷은 남편 것과 함께 빨래통에 넣었다. 드라이클리닝 맡겨야 할 실크 블라우스며 스커트, 남편 바지와 재킷 등을 꺼내놓았다. 남편 바지 뒷주머니에서 구겨진 영수증이 하나 나왔다. 보지 말까, 하는 고민을 딱 2초쯤 하고 그런 위선을 떨 이유가 없다는 사실에 도달했다. 영수증이 처리된 날짜와 시간이 그가 출장지에서 돌아온 날 새벽이었고, 서울 소재 호텔에서 지불된 것이다. 생일 새벽 누구와 무었을 했든 그가 출장지가 아닌 서울에 있었던 건 확실해졌다. 확실? 확실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내가 우스워 코웃음이 났다.

 

한밤의 수완나폼 공항은 낯선 사람들과 습한 열기가 뿜어내는 묘한 공기로 휩싸였다. 10년 전처럼 넓고 복잡하고 어수선했으나 나는 그때처럼 헤매지 않고 공항 밖으로 나와 택시 번호표를 뽑고 택시를 탔다. 여섯 시간 함께 비행한 옆자리 승객이 택시 타는 법 따위를 알려주지 않아도 될 만큼 나이를 먹었거나, 설레지 않거나.

택시가 호텔 프런트에 도착하자 벨데스크 직원들 네 다섯이 택시 쪽으로 나와 환대를 했다. 트렁크에서 수트케이스를 꺼내어 데스크까지 안내하는 직원이 애써 나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아무리 직업정신으로 무장한 웃음이라도 황송할 정도의 친절에 멀미가 가셨다. 택시를 타고 오는 동안 멀미로 속이 불편했다. 호텔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묻는 내게 기사는 대답에 앞서 속력을 높였다. 빨리 가달라는 소리로 알아들었나 보았다. 그때부터 멀미가 시작되어 호텔에 도착할 무렵에는 토할 것처럼 괴로웠다. 밤길을 달리는 동안 차창 유리를 내렸다 올렸다를 반복하면 견뎠다.

객실에서 짜오프라야 강이 보였고, 소파 테이블에는 옥빛 접시에 용과와 초콜릿이 셋팅 되어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린넨 냅킨 위에 두 사람 분 나이프와 포크가 정갈하게 놓였다. 테라스에 나가 강을 지나는 페리들과 맞은편 건물의 불빛이 화려하게 빛나는 짜오프라야의 밤을 넋 놓고 바라봤다. 기내식을 가볍게 하고 그 후로 먹은 게 없어 허기가 몰려왔다. 용과를 잘라 과즙을 삼키고 초콜릿으로 당도 보충하고 나니 피로가 몰려와 간단히 샤워 후 침대에 누웠다. 하늘을 보려고 일부러 커튼을 치지 않았다. 흐렸지만 경계가 없는 하늘이 어디까지라도 가 닿을 수 있을 것처럼 아득하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호텔 침구 특유의 서걱거림이 숙면을 방해했다. 새벽녘에야 잠이 든 것 같은데 열린 커튼 사이로 햇살이 깊이 들어와 늦잠 자기가 힘들었다. 기지개를 길게 켜고 스트레칭을 한 다음 벌떡 일어났다. 조식을 포함한 예약을 했으므로 더 늦기 전에 리버사이드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어야 한다.

간신히 양치만 하고 민소매 롱 원피스를 걸치고 머리는 질끈 올려 묶었다. 로비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외국인 커플을 만났다. 굿모닝, 편안해 보이는 웃음이 싫지 않아 나도 썩 괜찮은 척 굿모닝. 그들은 풀장이 있는 2층에 내리면서도 눈인사를 했다. 그래, 햇살이 쨍한 이 아침에 웃지 않을 이유는 뭐람.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들 여럿이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했다. 굿모닝 굿모닝 굿모닝. 테라스 테이블로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았다. 어젯밤처럼 이른 시각부터 페리가 운행하고 있다. 파라솔 아래 테이블 자리라 햇빛이 제법 있지만 강바람이 불어줘서 견딜만했다. 조금 더워도 리버뷰를 포기하고 실내로 들어가기는 싫었다. 어느새 테라스 테이블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몇몇은 나처럼 혼자서 식사하고 대부분은 가족이거나 연인들로 보였다. 강바람에 머리가 날려서 여러 번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커피를 마셨다. 강바람이 머리만 날리는 건 아닌 모양이다. 바로 어제까지 들었던 모국어도, 모국에서 있었던 일들도 제법 멀리 날아가 버린 심정이다. 살랑이는 바람처럼 가볍거나 시원하게 웃는 저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에 무엇을 두고 왔을까.

따뜻한 커피를 부탁했는데 따뜻한 티를 가져와서 다시 커피라고 말했더니 이번엔 아이스커피를 가져왔다. 내 표정을 보던 다른 직원이 눈치 빠르게 따뜻한 커피를 원하시죠? 라고 물었다. 내가 매우 그렇다는 눈빛으로 예스. 신선한 과일과 갓 구운 크로와상과 에그 타르트를 맛있게 먹었다. 조금 전 커피를 가져다 준 직원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따뜻한 커피 더 드실건지 물어서 진심으로 땡큐. 한국말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으니 말이 짧고, 누군가 내게 말을 할 때도 진심으로 열심히 듣게 된다. 잘 못 알아들을까 봐.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룸으로 올라갔다. 부족한 잠을 좀 더 자볼까 하고 침대에 누웠더니 정적이 온갖 생각을 불러왔다. 티브이를 켜서 채널을 돌리니 알 수 없는 언어들이 온 방을 부유했다. 티브이에 나오는 사람들 표정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상상해보다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벨소리에 잠이 깼다. 객실 청소를 하러 온 메이드가 언제쯤 청소를 원하는지 물었다. 수영복을 챙겨 풀장으로 나가면서 객실 정리를 부탁했다.

풀장이 한가해서 직원에게 물었더니 아침 일찍이거나 일몰 이후에 가장 붐빈다고 한다. 오후 2시 부터 6시까지 음료를 무료로 준다기에 2시에 나왔더니 이유가 있었다. 이용하는 사람이 적으니 서비스가 좋은 모양이다. 그늘 쪽에 썬배드를 정하고 맥주를 주문했다. 캐슈넛과 크랜베리가 섞인 안주를 투명 볼에 담아서 맥주와 서비스 칵테일을 가져다주었다. 앳되어 보이는 남자 직원이 코코넛과 천연향이 들어간 특제 칵테일이라는 설명을 열심히 하기에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보냈더니 만족한 얼굴로 돌아간다.

두 블록으로 나뉜 풀 중에 한쪽 풀은 나 혼자다. 물 속에 몸을 담그니 생각 보다 차가워 깜짝 놀랐다. 다른 쪽 풀에서는 부부와 어린 남자아이가 물놀이를 한다. 이제 막 수영을 익힌 듯한 아이를 부부가 데리고 논다. 물장구치는 아이와 부부의 대화 소리가 평화롭다. 영어 같기도 불어 같기도 한 이국의 언어가 노래 같기도 새소리 같기도 하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도 되어서 더 좋다. 그들도 한 번씩 내 쪽을 보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도 같지만 어차피 새들의 언어다. 풀에서 나와 남은 맥주를 마저 마시고 무료로 준 칵테일 잔도 비웠다. 아이와 부부가 풀장을 먼저 떠났고 곧 나도 룸으로 돌아갔다.

프론트 데스크에 리버사이드 레스토랑 이용시간을 물었다. 다행히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운영한다는 기분 좋은 대답이 돌아왔다. 룸으로 돌아와 샤워를 할 때부터다. 아 배고프다, 고 생각이 들더니 한 발짝씩 뗄 때마다 조금 더 배가 고프고 과장 하자면 숨 쉴 때마다 더 더 배가 고파온다. 점심을 거르고 수영했다고는 하나 내가 생각해도 과장이다. 과장이고 엄살이고 오버다. 그렇대도 나는 배가 고프다.

굿 아프터눈, 아침 식사할 때 따뜻한 커피를 두 잔이나 가져다 줬던 키 작은 남자 직원이다. 까무잡잡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전형적인 태국 남자다. 강 쪽이 좋으시죠? 예스. 아침에 앉았던 자리를 안내한다. 쿤 내가 지금 배가 고픈데 무얼 추천하시겠어요? 이름 앞에 쿤을 붙이는 태국 문화를 남편에게 들은 적이 있다. 팟타이를 알아요? 그가 물었고 나는 예스예스. 팟타이와 싱하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짜오프라야강에 페리가 지나다니는 모습을 보다 초록색 지붕에 호텔 이름이 새겨진 조그만 배를 발견했다. 옆이 창살 모양으로 트였고 나무 벤치가 놓인 작고 예쁜 배다. 쿤에게 물어봐야겠다. 아, 배가 고프다, 아무리 친절한 쿤이라도 팟타이가 늦어지니 심술 난다. 맥주라도 먼저 줄 것이지, 허공에 대고 눈을 흘기니 쿤이 나타난다. 팟타이는 먹음직스럽고 냄새도 근사하다. 땡큐 쿤, 그런데 저 배(초록지붕 배를 가리키며)는 뭐죠? 쿤은 호텔에서 운영하는 배가 맞고, 투숙객만 이용할 수 있으며 당연히 무료라고. 무료를 분명 강조했다. 저 배를 타고 건너편 왓아른(유명 사원이다)이나 아이콘시암(대형 쇼핑몰)에 갈 수 있다고 천천하게 또박또박 말한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쿤.

싱하 맥주와 팟타이는 오늘 내가 한 선택 중 최고다. 적당히 아삭한 숙주와 탱탱하면서도 부드러운 쌀면, 통통하고 싱싱한 새우. 어떤 것도 내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다. 식사 시간이 아니지만 강쪽으로는 빈 테이블이 없다. 칵테일을 마시는 커플도 그렇고, 태국 사람들로 보이는 남자들도 음료만 마신다. 식사를 하긴 이른 시각인 모양이다. 오후 다섯 시를 갓 넘겼다. 태양은 가깝고 어둠은 아직 멀다. 지금 이 시각을 저녁이라고 우기는 사람은 적어도 이곳에선 없는 듯하다. 착각 없는 도시라니. 살면서 우리는 자신마저 기꺼이 속이는 착각을 몇 번은 하게 되어있나 보다. 한 손을 높이 쳐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쿤이 와주면 좋으련만. 여기 싱하 맥주 한 병 더.

 

끝.

 

박 은 주

<약력>

세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수료.

2006년 동서커피문학상 소설부문 은상 수상 <석양의 왈츠>

2018년 한국소설 신인상 수상<비가 내리고 있다>

2020 신예작가 선정.<석양의 왈츠>

2023년 제9회 항공문학상 대상 수상 <오후 다섯 시, 두 가지 착각 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