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창간호 2025년 4월 1호
심지가 부러진 인형처럼 앞으로 허리를 꺾은 노인이 걷고 있었다. 우산도 없이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앞으로 숙인 상체로 손에 든 컵을 보호하고 있었다. 사선으로 내리꽂히는 빗물은 노인이 든 컵 안으로 사정없이 들어갔다. 아파트 6층 계단형 복도 창문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던 홍 여사는 미간을 찌푸리다 못해 안절부절 연신 두 손바닥을 비벼댔다.
‘우째, 저 일을…’
달인 한약이 빗물에 섞여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여든이 넘은 노인이 비를 맞아 병이라도 날까 싶어 안달이 났다.
노인은 빗길을 뚫고 어린이놀이터를 가로질러 203동 공동현관으로 사라졌다. 노인이 안 보이자 홍 여사는 안도의 숨을 내쉰 뒤,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러곤 발밑에 놓인 쇼핑백과 보자기에 싼 음식 보따리를 내려다봤다. 음식이 식어갈수록 홍 여사의 마음도 서늘해져 갔다.
홍 여사는 시간을 확인하지 않아도 지금이 몇 시인지 알지만, 휴대전화를 열어봤다. 외손자인 훈이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조급증이 일자 또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몇 걸음 안 되는 복도를 서성이다 다시 창틀에 붙어서 밖을 내다봤다.
딸 지숙이 있었을 때는 한 번도 복도를 서성인 적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본 적도 없었다. 훈이가 어렸을 때 놀았던 놀이터가 보였다. 보는 위치에 따라 세상은 달라지는 법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놀이터는 낯설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의 놀이터는 어린아이가 비를 맞고 서 있는 것처럼 애처로웠다. 홍 여사는 못 볼 것을 본 것마냥 얼른 눈을 들어 하늘을 봤다. 비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휘날렸다. 홍 여사는 거센 빗줄기 사이로 다시 놀이터를 살펴봤다. 훈이가 즐겨 타던 예전의 미끄럼틀이 아니었다. 겁에 질려 엉거주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던 훈이 환하게 표정을 바꾸던 순간을 그녀는 잊을 수 없었다. 세상을 향해 한 발 내디딜 때마다 홍 여사는 훈의 곁에 있었다. 이제 눈앞에 선 미끄럼틀은 공중에 매달려 이동하는 놀이기구에서부터 미로 같은 통 속으로 틀어가 사방팔방 뚫린 구멍으로 나갈 수 있는 거대한 성(城) 같았다. 이제 훈이 어디로 나올지 알 수 없어졌다.
초점을 잃은 홍 여사는 방금 빗길을 뚫고 손에 든 컵을 보호하며 거침없이 걷던 노인의 잔영을 떠올렸다. 저돌적인 발걸음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황소의 뿔처럼 보였다. 자신에게서 사라진 달뜬 열기가 노인에겐 있었다. 홍 여사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홍 여사는 왜 아파트 비밀번호가 안 맞는 건지 이해가 안 되었다. 몇 번이나 눌러봐도 경고음만 울렸다. 하도 엄청난 일을 겪다 보니 머릿속 기억장치가 망가진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지숙이 홍 여사의 결혼기념일을 비밀번호로 저장한 것이라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번호였다. 그녀는 도어록을 찬찬히 살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홍 여사는 사위와 손자에게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일하고,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될까 싶어 망설여졌다. 경비실에 음식을 맡겨도 되지만 손자를 보고 싶은 마음과 딸의 공간을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그녀를 오도가도 못 하게 잡고 있었다.
수요일은 훈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수학학원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 씻고 저녁을 먹은 후, 학습지 수업을 받는 날이었다. 방과 후, 훈을 돌본 사람이 홍 여사였기에 일과를 꿰고 있었다. 왜 안 오는 걸까? 갑자기 불안감에 가슴이 벌떡인다. 그녀는 양손을 맞잡아 가슴에 대고 꾹 눌러본다. 조금만 기다리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훈이를 보게 된다. 홍 여사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것도 잠시, 이내 입매가 떨렸다.
발밑에 놓인 보따리를 홍 여사는 다시 내려다본다. 사위가 좋아하는 겉절이와 청양고추 두어 개가 들어간 멸치 꽈리고추 볶음, 도라지, 고사리, 무침 등 나물 반찬과 훈이를 위한 소갈비찜과 진미채 볶음, 그리고 두 남자의 보양식인 추어탕까지. 굵고 힘 좋은 미꾸라지들이 함지박에서 벗어나려 서로 엉켜 꿈틀대던 게 떠올랐다. 이젠 징그럽고 무서운 것도 없었다. 두 남자를 위하는 일이라면. 홍 여사는 두 손으로 눈가를 누르며 볼을 다독였다. 좀 더 생기있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자 손가방에서 립스틱을 꺼내 입술에 발랐다. 왠지 화사한 기운이 도는 듯해 조금 기운이 났다.
홍 여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입이 말랐다.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층수를 쳐다보면서 그냥 가야 하는지 기다려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서너 달 사이 훈의 일과가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괜한 일을 벌인 것은 아닌가 혼란이 일었다. 사위는 말했었다.
“어머니, 이제 어머니 몸을 챙기세요. 그러다 병나시면 제가 더 괴롭습니다.”
홍 여사는 그 말의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것인지, 그녀의 이마에 짙은 주름이 지어졌다.
엘리베이터 숫자 6에 밝은 등이 켜지면서 문이 열렸다. 훈이다. 홍 여사는 급한 마음에 몸이 앞서 나가 발치에 놓인 보따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훈아, 훈아, 훈이 홍 여사를 보고 눈이 동그래지면서 입이 벌어진다. 홍 여사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훈은 엉거주춤 멈춰서 뒤를 돌아본다. 이어 엘리베이터에서 한 여자가 내렸다. 핑크빛 원피스에 작은 핸드백을 들고 있었다. 누군가 싶어 홍 여사의 눈이 가늘어진다. 이내 홍 여사의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번졌다. 강 선생이었다. 홍 여사는 훈을 향해 더 크게 팔을 벌린다. 하지만 훈이는 그 자리에 멀뚱히 서 있을 뿐이다. 계면쩍어진 홍 여사가 벌린 두 팔을 거뒀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못 본 새 훈이 의젓해진 것도 같고 왠지 낯설다. 뒤이어 강 선생이 인사를 한다.
“오셨어요. 언제 오셨어요?”
“아, 조금 전에 왔어요. 현관 비밀번호가 생각이 안 나서. 박 서방과 훈이 좋아하는 반찬 몇 가지 만들어왔어요. 강 선생님 오늘 수업 있는 날이지요?”
홍 여사는 강 선생이 걱정할까 싶어, 금방 온 것처럼 둘러댄다.
“네.”
강 선생이 홍 여사를 지나쳐 현관문 앞에 서더니 비밀번호를 누른다. 홍 여사에게는 날카로운 경고음만 날리던 견고한 현관문이 스르르 빗장을 풀었다. 홍 여사는 훈이 아니라 강 선생이 현관문을 여는 순간 눈은 커지고 입은 벌어져 멍한 표정을 지었다. 혼미한 상태에서도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그녀는 황급히 두 손을 가슴에 대고 지그시 눌렀다.
강 선생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훈이가 따라 들어갔다. 홍 여사는 망연자실 멍하니 서 있었다. 담담한 목소리가 집 안에서 흘러나왔다.
“들어오세요. 오셨으면….”
홍 여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음식 보따리를 질질 끌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보따리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강 선생을 똑바로 바라봤다. 강 선생은 그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훈이에게 말했다.
“젖어서 축축하지? 어서 씻어. 저녁 준비해 줄게.”
그리고 홍 여사가 가져온 보따리를 힐끗거리더니 홍 여사를 향해 건조하게 말했다.
“훈이가 요즘 살이 많이 쪄서 다이어트식으로 먹이고 있어요.”
“다이어트식?”
홍 여사는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당황한 홍 여사는 겨우 입을 열었다.
“내 보기엔 살이 빠진 것 같은데, 무슨 살이 쪘다고 그래요?”
“네, 할머니의 마음은 알지만, 건강을 위해 새롭게 식단을 시작했어요. 이해해 주세요.”
홍 여사의 성난 눈동자가 서서히 가늘어졌다. 강 선생이 이 집 주인 노릇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훈의 어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서너 달 사이에 모든 게 변했다. 하긴 1분, 1초에도 세상은 변할 수 있지.라며 홍 여사는 마음을 다독인다. 세상이 찰나에 바뀐다 해도 어찌 훈이가? 데면데면 대하는 훈에게도 서운했다. 서로 끌어안고 물고 빨고 하던 녀석이 남 대하듯 하다니. 홍 여사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떨리는 감정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어금니를 꽉 물었다.
홍 여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집 안을 둘러보듯 돌아섰다. 집안 분위기도 뭔가 달라져 있었다. 가구는 그대로인데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흥분상태라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달라진 것은 맞는데…. 격하게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기 위해 다시 몸을 부엌 쪽으로 돌렸다.
강 선생은 제집인 양 태연하게 냉장고를 열고 채소를 꺼내 놓는다. 양상추, 파프리카, 양파….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에 채소 씻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도마 위 칼질 소리로 바뀌었다. 일정한 리듬을 타면서 정적이 감도는 집 안을 울렸다. 강 선생이 갑자기 뒤에 서 있는 홍 여사가 생각난 듯, 칼질하며 묻는다.
“뭐, 차라도 드릴까요? 저녁을 드리기도 뭣하고. 훈이 저녁 먹인 후, 학습지 시작해야 하거든요.”
“아니, 아니 됐어요. 반찬만 주고 가려고 했던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일해요.”
홍 여사는 다시 몸을 돌려 소파에 앉았다.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딸의 살림이긴 하지만 훈이를 돌보면서 자기 살림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런데 주객이 전도되어 강 선생이 안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얼떨결에 손님의 처지가 되어버린 상황이 기가 막혔다. 끙, 저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홍 여사가 천천히 말했다.
“그래요. 나 차 한 잔 줘요. 밖에서 한참 서 있었더니 몸이 떨리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 선생의 원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오시려면 전화를 주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시간에 맞춰 왔을 텐데요.”
홍 여사는 아무 말 없이 훈이 들어간 욕실 문을 바라봤다. 어서 훈을 꼭 끌어안고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조금 전 자신에게 달려들지 않은 것은 축축하게 옷이 젖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런 거다, 라고 반복해 입속으로 되뇌었다. 씻기 싫어했던 훈이 어쩐 일인지 욕실에서 오래 있었다. 잠시 후, 훤해진 얼굴로 훈이가 욕실에서 나왔다. 홍 여사는 적지에서 아군을 만난 듯 훈을 불렀다. 훈이 발그레한 얼굴로 홍 여사에게 다가오려 하자 강 선생이 단호하게 훈을 막아섰다.
“물기 잘 닦았니? 어서 저녁 먹고 학습지 해야지.”
우뚝 멈춰서 눈만 멀뚱대는 훈이 안쓰러워 홍 여사가 말했다.
“그래, 배고프겠다. 어서 저녁 먹어라.”
훈이 식탁 앞에 앉았다. 언제 구웠는지 샐러드 위에 큼지막한 스테이크가 올려져 있었다. 강 선생은 가위로 스테이크를 뭉텅뭉텅 썰었다. 고기의 단면에서 붉은빛이 감돌았다. 예전 같으면 생고기라고 훈이 인상을 썼을 텐데 묵묵히 고깃점을 입으로 넣은 후, 홍 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홍 여사는 눈을 껌뻑여 삐져나오려는 눈물을 삼켰다. 훈이는 서너 달 사이에 몰라보게 자란 것도 같고 얼굴에 살이 붙은 것도 같았다. 제 어미 떠나고 아무리 챙겨 먹여도 핼쑥하다 못해 기운이 없어 더 가엾게만 보였던 아이였는데 살찔 것을 걱정해야 할 만큼 살이 올랐나 싶어 보고 또 보았다. 한편으로는 고맙고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강 선생이 대추차를 내왔다. 장미꽃이 활짝 핀 찻잔 안에는 티백에서 우러나온 대춧물이 비바람을 뚫고 내달리는 노인의 풀어헤친 머리카락처럼 번졌다. 못 보던 찻잔이었다. 지숙은 투박한 옹기 찻잔을 좋아했었다. 이천 도자기축제에서 찻잔을 사 왔다며 자신에게도 접시와 찻잔을 선물했었다. 지숙은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좋아했었는데. 홍 여사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연신 소파 팔걸이를 쓸어내렸다. 마치 딸의 온기를 느끼려는 듯,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지숙은 홍 여사에게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자기 일을 척척 알아서 하는,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친구 같은 딸이었다. 그런 딸이 처음으로 속을 썩인 것은 결혼상대자로 경석을 데려온 때였다. 홍 여사의 남편은 공직자로 안정된 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가난의 불편을 모르고 자란 지숙이 고아나 마찬가지인 경석을 결혼상대자로 데려오자 홍 여사는 머리를 싸매고 눕고 말았다. 비단결 같고 순부두처럼 말랑대던 지숙이 이번만큼은 황소고집을 부렸다. 결국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딸에게 ‘네 고집대로 살아 보라’고 포기 같은 승낙을 해 주었다.
다행히 경석은 어렵게 자랐지만, 됨됨이가 된 사람이었다. 장인, 장모가 싸늘하게 대해도 서운하다 말하지 않고 언제나 환한 얼굴로 처가를 방문했다. 둘이 힘을 모아 창업을 해서 정신없이 일에 매달렸다. 형편이 어려워도 도와달라는 내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홍 여사 부부를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홍 여사는 딸 부부를 앉혀놓고 투자하겠다고 했다.
사위는 그때 눈시울을 붉히며 머리를 숙였다. 너무 힘들어서 사업을 접으려고 했는데 어찌 알고 도와주시냐고 정말 감사하다고. 언젠가는 꼭 갚겠다고 말했다. 딸 내외는 열심히 살았다. 차츰 사업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훈이도 태어났다. 홍 여사는 딸네를 오가며 살림을 돕고 훈을 키워 주었다. 홍 여사의 도움은 딸 내외가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성공의 불씨가 되어주었다.
딸 부부가 첫 집을 장만해 이사하던 날, 홍 여사 부부에게 경석은 큰절을 올리며 감사해했다. 모든 삶의 뿌리가 장인, 장모라며 눈물을 훔쳤었다. 이제 사업은 궤도에 올랐고 인생을 즐기며 살아도 될 만큼 풍요로워졌다. 홍 여사는 지숙에게 회사 일에서 벗어나 편안한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제 훈이도 잔손이 가지 않는 고학년이 되었기에 자신도 남편과 함께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고 싶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햇살이 따뜻한 아침이었다. 경석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지숙이 병원에 있다는 것이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딸이 왜? 단지 감기 기운이 있는지 머리가 아프다고 했었다. 홍 여사는 따끈하게 대추차를 끓여 얇게 썬 대추와 잣을 띄워 지숙에게 먹이고 일찍 자라고 이불까지 덮어주고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런데 쓰러지다니.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서 한 달을 버티던 지숙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떠나고 말았다. 지숙이 떠나고 난 후, 두 집안은 고장 난 시계처럼 시간이 멈추고 말았다. 모두가 말을 잃었고 눈은 초점 없이 허공을 떠돌았다.
모든 것이 망가지기 전에 가족들은 모여 기도했다. 지숙은 먼 여행을 떠났다고. 가족들은 그렇게 합의했다. 그렇게 생각해야 살 수 있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지숙이 어딘가에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여행을 즐기고 있는 거라고. 땅이나 바다 아니면 우주를 여행한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언제인지, 어느 곳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만날 수 있다고. 살아 있어도 평생을 못 보고 사는 사람도 있고 존재 자체를 잊고 사는 사람도 있다. 그거에 비해 지숙과의 만남은 잠시 보류해 놓았을 뿐이라고. 그러자 숨통이 트였다. 숨이 쉬어지자 눈이 뜨이고 음식이 넘어갔다. 지숙이 행복한 여행을 하는 동안 남은 가족들도 즐겁게 살기로 작정했다. 만났을 때 어찌 살았는지 이야기하려면 하루하루 허투루 살 수가 없는 일이었다. 지숙과의 만남을 위해 오늘을 잘 살아내야 한다. 우울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버티고 견뎠다.
홍 여사는 사위와 손자가 걱정돼 매일 들락거리며 지숙의 빈자리를 채웠다. 그러나 자신이 나타남으로 인해 지숙이 떠오른다는 술에 취한 경석의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홍 여사는 곰곰이 생각했다. 사람이 난 자리는 사람이 들어서 채워야 한다. 1년이란 시간이 어찌 보면 이르긴 하지만 누군가 경석과 훈에게 필요했다. 그때 학습지 선생인 강 선생이 떠올랐다.
30대 후반인 강 선생은 미혼이라고 했다.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만 40대 후반에 아이까지 딸린 사별남을 들이댄다는 것이 미안하고 이기적인 일이었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라고 홍 여사는 강 선생의 눈치를 살폈다.
홍 여사가 강 선생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왠지 모를 친근감이었다. 훈이를 키우면서 학원 선생이나 학습지 선생을 많이 만났지만, 강 선생은 남다르게 정이 갔다. 예의 바르면서도 다소곳한 태도와 웃으면 오른쪽 송곳니 쪽에 덧니가 살짝 드러나는 것도 귀여웠다. 요즘은 누구나 교정을 해 덧니 보는 것도 귀한 일이라고 홍 여사는 속으로 웃었다. 덧니가 보일 만큼 활짝 웃는다는 것은 자신감이 있다는 것이고 숨김없이 속내도 드러낸다는 것이기에 투명해서 좋았다. 웃음이 예쁜 여자라면 두 남자를 행복하게 해줄 것만 같았다. 특히 훈이, 강 선생을 잘 따른다는 것도 한몫했다. 지숙이 떠난 후, 움츠러드는 훈을 강 선생은 살갑게 보살펴 주었다. 수업 시간도 차츰 길어지고 훈의 웃음소리도 문밖으로 흘러나와 홍 여사를 안도하게 했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난 후, 홍 여사는 강 선생에게 차 한잔을 권하며 넌지시 의중을 물었다.
“강 선생님, 한 2여 년 동안 훈이를 가르치면서 우리 집 내막을 대충 아실 거예요. 훈이 엄마가 갑자기 떠난 후, 박 서방이나 훈이가 갈피를 못 잡고 힘들어하는데 괜찮다면 두 남자를 살펴봐 주면 어떨까요? 너무 염치없는 말이라 목구멍에 걸려 말도 안 나오지만, 두 남자 정말 좋은 사람들인 거 아시죠. 그냥 편한 마음으로 우리 박 서방 한번 만나봐 줘요.”
강 선생은 놀란 토끼 눈으로 홍 여사를 빤히 쳐다보다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아니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요. 알아요. 그런 생각을 어찌하겠어요. 그러니 지금부터 한번 생각해 봐줘요.”
홍 여사의 간절한 호소가 먹혔는지 마지못해 강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홍 여사는 즉시 경석에게 매달렸다.
“자네도 힘들겠지만 이제 겨우 초등학교 6학년인 훈이를 생각해서라도 새 여자를 만나보게. 혼자 살기엔 자네가 너무 젊고 훈이는 너무 어려.”
경석 역시 무슨 말이냐고, 지숙이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시냐고 벌컥 화를 냈지만 홍 여사의 애절한 부탁과 다그침에 만남을 수락하게 되었다. 홍 여사는 사위가 젊게 보이도록 미용실로 끌고 가 앞 머리카락을 파마해 힘을 주고 내추럴한 세미 정장을 입혀 약속 장소에 내보냈다.
홍 여사는 만남이 어찌 되었는지 간을 졸이며 기다렸고, 둘 다 감정을 얼버무려 대답했지만 싫지 않은 눈치였다. 두 사람은 천천히 시간을 가져 보겠다고 했다. 사실 강 선생이 훈의 수업을 위해 집을 방문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만남이 있었을 거라 홍 여사도 미루어 짐작했다. 만약 이 만남이 잘못되면 그나마 훈이가 마음 문을 여는 강 선생을 놓칠 수도 있었다. 홍 여사는 이래저래 마음을 졸였다. 마음 한편에는 두 남자가 걱정돼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떠돌고 있을 딸이 생각나 하염없이 눈물만 훔치기도 했다. 그러다 두 남자에게 안정적인 집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조급함이 밀려와 두 사람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석이 주저하며 말했다.
“어머니, 왔다 갔다 하시기 힘드시죠. 언제까지 어머니에게 기댈 수만은 없는 것 같아요. 강 선생이 자주 찾아와 훈을 돌봐 주기로 했어요.”
그 말을 내뱉은 경석의 표정에 묵은 때를 벗겨낸 후련함이 깃든 반면 홍 여사는 숨이 막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보지 않은 곳에서 두 사람이 가까워졌단 말인가. 바라던 일인데 섭섭한 기분은 뭐란 말인가.
그 후, 홍 여사는 딸네 집에 걸음을 멀리했다. 훈이는 연신 전화를 걸어 할머니 왜 안 오냐고 울먹였지만, 할머니가 몸이 안 좋아 괜찮아지면 가겠다고 훈을 달랬다. 경석의 전화에도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라고 훈훈하게 말했다. 사실 두 남자의 생활이 걱정되기도 하고 사위의 말이 서운하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 두 남자와 자신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래도 내 자식인데 하는 마음이 매일 싸워댔다. 두 마음의 전쟁이 불타오를수록 홍 여사는 음식을 도통 먹을 수 없었고 음식을 못 먹으니 기운은 점점 떨어져 갔다. 그러는 사이 서너 달이 훌쩍 지나갔다. 시들어가는 홍 여사를 보고 그녀의 남편은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당신이 사위에게 여자를 소개해 줬잖아. 그래 놓고 왜 이리 정신을 못 차려. 그 사람들은 그 사람끼리 사는 게 맞아. 신경 꺼도 돼.”
“아니, 강 선생 눈매가 날카롭다니까요. 예의가 발라 보이지만 그 속을 어찌 알겠어요.”
“무슨 소리야, 당신이 그랬잖아. 속이 훤히 보이는 착한 여자라며.”
“그래요. 더 이상 어찌 크게 웃겠어요. 덧니를 보이며 활짝 웃는 모습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거죠. 그렇지만 우리 훈이에게 막대하면 어쩌지요. 얼마나 여린 아인데.”
“지금까지 사귀고 있다는 보장도 없잖아. 안 그래?”
“맞아요. 헤어질 수도 있지. 그럼 두 남자가 영양실조 걸린 것 아닐까요? 먹을 것 좀 만들어 가져다줘야겠어요.”
“요즘 시대에 영양실조는 무슨.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갔다 와요. 박 서방 회사도 잘 돌아간다고 하니까 괜찮을 거야. 불쌍한 건 떠난 놈뿐이지.”
남편이 말을 흘리자 홍 여사는 불끈 힘이 났다. 음식을 해다 주는 거였다. 사위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다 주면서 그 집 사정을 살펴보면 된다. 음식을 만드는 홍 여사의 손이 바빠졌다.
홍 여사는 미지근한 대추차를 한 모금 입 안에 머금었다. 그리고 천천히 뚫어지게 이곳저곳을 살폈다. 거실 정면에 걸린 가족사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가지 끝에 달린 물방울을 그린 그림이 걸려있었다. 물방울은 영롱하고 빛났지만 위태로워 보였다. 홍 여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TV가 걸린 벽면 밑 거실 장 위에는 지숙의 흔적들이 담긴 사진이 놓여있었는데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오도카니 놓인 액자사진에는 경석과 훈이 강 선생을 사이에 두고 서서 웃고 있었다. 베다란 창문 앞을 가득 채웠던 다양한 화초들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커다란 고무나무 두 그루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 떨어질 것 같은 홍 여사의 눈빛을 좇던 강 선생이 조용히 말했다.
“집에 잡다한 화초가 많은 것보다 큰 화초가 있는 게 깨끗하고 멋이 있어서요.”
“아니, 그 화초는 훈이 어미가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축하와 감사의 의미로 사들였던 것인데… 그걸 얼마나 귀하게 보살폈는데, 화초 다 어디 있어요?”
자신도 모르게 앙칼지고 날 선 음성이 튀어나왔다. 강 선생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아파트 장 서는 날, 화초 파는 아저씨에게 주었어요. 제가 가꾸다 죽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괜찮지요?”
홍 여사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과거 자신이 알고 있던 강 선생이 맞나 싶었다. 다소곳하지만 활짝 웃던 덧니가 예뻤던 여자,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던 여자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덧니가 보이지 않았다. 왜 여자가 낯설게 느껴졌는지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입술을 크게 벌리지 않은 채 말하고 있었다. 입술이 벌어지지 않자 얼굴 근육은 굳어져 감정을 얼굴에 담아내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표정을 잃어버린 걸까?
딸의 흔적이 지워져 가는 공간, 서운하고 서러워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덧니를 숨긴 강 선생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이제 제가 훈이 수업해야 하는데 어쩌시겠어요?”
홍 여사는 벌떡 일어났다. 머리가 핑 돌았다. 휘청이며 일어선 홍 여사가 손가방을 집어 들었다. 현관을 향해 비적비적 걷자 언제 다가왔는지 훈이 인사를 꾸벅한다.
홍 여사는 훈을 끌어안으려다 멈칫했다. 훈의 어깨에 강 선생이 손을 올리고 빙긋이 웃고 있었다. 홍 여사는 고개를 갸웃댔다. 순간 예전에 강 선생이 한 말이 되살아났다.
“제가 여러 집을 방문해 보지만 훈이네 집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집이 없어요. 집안 사정이 어려워 결혼 시기를 놓쳐 결혼은 잊고 살았는데 훈이네를 보면 저도 가정을 갖고 싶어져요.”
라며 덧니를 활짝 보이며 웃던 모습이. 그런데 홍 여사 앞에는 입술을 다문 채 웃는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홍 여사는 당혹스러워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목이 잠겨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헛기침을 몇 번 한 후, 훈을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깊은 눈빛으로 사랑을 전한다. 혹시 슬픈 마음을 눈치챌까 얼른 고개를 돌렸다.
현관을 나서는 순간 등 뒤에서 철컥 도어록 잠기는 소리가 났다. 홍 여사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아니 이게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무엇을 원했던 건지, 홍 여사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지숙이 떠난 자리에 강 선생이 들어와 두 남자를 보살펴 주길 원했으면서 왜 이리 혼란스럽고 괴기스러운 감정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 남자를 빼앗긴 기분보다는 두 남자의 배신이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땅을 디뎠지만, 다리는 휘청대고 발은 허공에서 내려놓을 곳을 찾지 못해 허청댔다. 어느새 비는 그쳤고 가로등에는 불이 들어왔다. 홍 여사는 어린이 놀이터 앞에 서서 자신이 금방 빠져나온 205동 6층을 올려다봤다. 창문에는 환한 불빛이 비쳤다. 그리고 노인이 들어간 203동을 바라봤다. 어느 곳에선가 노인과 그녀의 딸이 TV를 보면서 웃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날은 모처럼 지숙이 쉬는 날이었다. 겨울이라 일찍 해가 지고 있었다. 베란다에 서서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바라보던 지숙이 홍 여사를 불렀다.
“엄마, 저 할머니 뭐 하는 거예요? 왜 저러고 가지?”
홍 여사는 지숙을 따라 창밖을 내다봤다.
“뭐가? 아, 저 할머니 말이냐? 글쎄 한약을 달여서 딸에게 가져다주려고 저렇게 간다는구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 년 365일, 매일 5시에 금방 달인 약을 식기 전에 먹이려고 컵에 담아서 허겁지겁 달려가는 거란다. 몇 분의 착오도 없이. 거의 시계 수준이야. 저 노인 지나가고 나면 시계 안 봐도 다섯 시야. 뚜껑 닫는 것조차 잊고 말이다. 반은 정신이 나갔다고 봐야겠지.”
“딸과 한집에 안 살아요?”
“딸이 사고 나기 전에는 지방에서 살았다고 하지. 딸이 사고가 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까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와서 저렇게 약을 달여 가져다준다는구나. 나도 경비아저씨에게 들었어.”
지숙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물었다.
“어쩌다 다쳤대요?”
“딸네 가족이 여행을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대. 사위와 손녀는 멀쩡한데 딸만 저렇게 됐다는구나. 다행히 사위와 손녀가 끔찍하게 여자를 위한다는구나. 감사한 일이지.”
홍 여사와 지숙은 한여름에도 두꺼운 스웨터를 입고 며칠째 감지 않은 떡진 머리로 거리를 걷던 여자가 떠올랐다. 항상 히죽대던 여자의 손에는 무엇이 담겼는지 알 수 없는 검은 봉지가 들려있었다.
홍 여사는 노인과 그녀의 딸을 길에서 마주치면 속으로 혀를 찼다. 불쌍하고 애처롭고 안타까워서. 그런데 지금은 그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안을 수 있는 실재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부럽고 부러워 눈물이 쏟아졌다.
노인은 내일도, 모레도 한약 달인 컵을 들고 딸에게로 탱크처럼 돌진할 것이다. 홍 여사는 노인이 들어간 203동을 다시 올려다봤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팔짱을 낀 것처럼 오른쪽 팔을 굽혀 삼각형 공간을 만들었다. 마치 여행 갔던 지숙이 돌아와 홍 여사의 팔짱을 낀 것처럼. 홍 여사는 치아가 환하게 드러나도록 활짝 웃으며 어린이놀이터를 가로질러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