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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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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외득

책 아이콘문학 이야기 창간호 2025년 4월 1호

요섭은 카드키 모양만 봐도 속이 매슥거렸다. 벌써 10년 전이다. 세월이 지났건만 지금도 뻥 뚫린 가슴에 얼음 알갱이가 박히듯 그의 가슴에 시린 바람이 불었다. 그날 요섭은 행복했다. 평생 함께할 사람과 맺는 사랑의 언약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토록 애타게 했던 여자, 처음에는 수정의 마음을 전혀 열지 못했으나 그녀의 마음을 얻기까지 요섭은 그야말로 집념의 사람이었다.

운명을 믿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우연한 사건 정도였겠지만, 요섭은 운명이라는 끈을 끝까지 믿었다. 마침내 끈질긴 구애로 수정의 마음이 열리자 그들은 단번에 사랑이 달아올랐다. 삶이 치열하다 보면 낭만이 뜬구름 같다고, 선한 관념에서 보면 욕망이 죄악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낭만이나 욕망이 없다면 과연 남녀 간의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뜨거운 감정 앞에서 옷감 한 장에 가리고 벗는 것으로 정함과 부정함을 구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들 앞에서 통념마저 굴복할 수밖에 없을뿐더러 젊은이의 육체적 결합은 마땅한 권리였기에 단 필 정죄도 결코 위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수많은 여자 중에서 요섭의 눈에 차는 사람이 없는 그때, 수정이 나타났다. 이성에 눈뜨면서 오직 한 여자에게 집중하는 것, 그게 의도하였든 아니었든 간에 요섭은 수정에게 자기의 순수한 사랑을 다 바친 셈이다.

서른을 넘기지 말라는 부모님 뜻이 있었지만, 서른두 살에 동갑인 수정과 결혼식을 올렸다. 수정이 요섭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3년 후였다. 신혼여행지는 수정의 바람대로 푸켓이었다. 여행지에 도착하자 기대했던 멋진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어쩌면 부부가 된 자신들이 경이로운 자연의 일부임을 자랑하고 싶은지, 두 사람은 과할 정도로 눈앞의 광경을 예찬하였다.

하늘 낮게 내려온 새하얀 구름과 옥색의 바다. 수정은 들뜬 목소리로 내일부터 둘러볼 곳곳의 섬들에 대한 특징을 요섭에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스노클링에 대해 걱정하는 말투로 애교를 부렸다. 밝은 그녀였다.

그들 옆에는 또 한 쌍의 신혼부부가 있었다. 기내서부터 서로 알게 된 김산은 요섭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았다. 서로 바다와 관련된 대화를 하던 중 비슷한 시기에 군 복무지가 해병대로, 요섭은 제6여단 백령도에서, 김산은 제1사단 포항에서 복무한 사실을 알게 되자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두 사람은 금세 친해지고 말았다. 거기다 묵을 호텔마저 같은 곳이라는 사실에 운명을 들먹이며 호들갑을 떨 만도 했다.

수정이 못지않게 김산의 신부 또한 몸매가 놀라웠다. 유행처럼 하는 다이어트 효과 때문인지는 몰라도 수정과 비슷한 체형으로 뒷모습이 아주 닮은 게, 어쩌면 여체의 신비감이 뒷모습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저 신비감. 요섭은 미묘한 미소를 흘렸다. 그녀의 이름은 혜민이었다. 그녀는 수정보다 두 살 아래였다.

요섭은 수정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그의 만면에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첫 키스를 했을 때도 이처럼 느끼지 못했던 기분, 오늘은 확실히 달랐다. 온종일 그의 마음이 들떠있었다. 모든 것이 그들을 위해 맞춰져 있고, 그들을 위해 예비해놓은 듯 평소 같으면 피했을 따가운 햇볕까지 천상에서 내려오는 팡파르였다.

요섭이 김산 부부를 바라보았다.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 속에서 닮은 운명이 있다는 것, 정말이지 매우 흥밋거리였다. 요섭이 수정을 위해서 누구보다도 더 멋진 남편이 되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결혼 전 이미 수정과 육체의 사랑을 나누었지만, 부부로서 첫날인 만큼 잔잔한 물결이 속살거리듯 내내 설레는 그의 가슴에, 노을이 사라지자 이내 습한 밤안개가 그들의 몸을 휘감는다.

 

*

 

넋 놓고 사는 사람에게 힁허케 가버린 10년이다. 길다면 긴데 그야말로 찰나 같은 시간이다. 요섭에게 그 시간은 너무나 긴 고통이었다. 악몽 속에 갇힌 그는 한순간도 언짢은 기분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의 세상에선 전부가 비상식적이다.

지금 앞서서 걸어가는 40대 초반은 되어 보일 여자마저 요섭의 눈에서는 동물 같은 존재로 보일 뿐이다. 여자의 뒤태가 자꾸만 요섭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씨팔년, 저거 맛 끝내주겠다야. 요섭은 여자의 뒤를 바짝 따랐다. 지금은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멋진 인격자가 괴기한 생물체로 변했다. 저년이 씨팔년이라는 뜻을 알기나 할까, 그는 정신 나간 사람마냥 그저 낱말이 흐트러지는 대로 내뱉었다.

요섭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노상 취객처럼 보였다. 아니, 술맛만 봐도 속이 뒤집히는 탓에 오히려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사실 이미 오래전에 그의 육체는 정욕마저 말라버린 성불구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멋진 여자의 뒷모습만 보면 무작정 쫓아가는 괴이한 버릇이 생겼다. 그러면서 요섭은 어떤 여자와도 대면으로 맞닥뜨리지를 못한다. 단지 뒷모습에 유독 집착할 뿐이었다. 그건 아마도 마음에 응어리진 분노와 성불구자로 사는 무기력한 그에게서 유일한 욕정탈출구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Y 쇼핑몰로 들어서고 있는 여자. 인근 동네와 비교해서 발전이 낙후되었다는 K 동네 사거리에 쇼핑몰이 들어서고부터는 이 지역도 번화가의 흉내 정도는 내게 되었다.

쇼핑몰 1층의 내부가 화려했다. 마치 정원이 있는 휴양지 같다. 여자는 짙은 파란색 바지에 흰색 셔츠와 빨간색 자켓을 입었다.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세련된 모습. 무슨 옷을 입어도 받쳐줄 멋진 몸매였다. 저년 저 몸매 유지하려고 남편 등골이나 뺐겠네. 여자와 거리가 멀어지자 요섭은 재바른 걸음으로 그녀를 향해 거리를 좁혀갔다.

사실 요섭은 수정의 위성이라도 되고 싶었다. 정말이지 간절하게 그것을 바라는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물어물어 들은 것이, 그녀가 Y 쇼핑몰과 가까운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있다는 누군가의 확신 없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그때부터 Y 쇼핑몰 주변을 기웃거리며 살았다. 그에게 있어 그나마 소망을 잡고 살게 하는 힘이었다. 어차피 인생을 꼬라박은 그의 개차반 같은 삶이라서 희망이 없지만, 그래도 그녀를 잊지 못하는, 그녀의 삶이 궁금하기도,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끊어낼 수 없는 애틋한 심정이고 보니, 물론 군데군데 이 빠진 톱니바퀴처럼 도는 그의 본질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곳 아파트 단지에서 그가 가랑잎같이 배회하며 시간을 할퀴고 있었다.

앞서가던 여자가 아동복 코너로 돌고 있었다. 애들이 아직 어린가, 요섭은 갑자기 여자의 얼굴이 궁금했다. 그는 제도지 위에 컴퍼스로 그려지는 원처럼 여자의 축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의 눈앞에 아이 모습의 마네킹에 입혀놓은 망사롱원피스가 예뻐 보였다.

여자의 얼굴을 힐끔 보던 요섭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둔탁한 물체로 한 대 얻어맞을 때와 같이 정신이 혼미해졌다. 핏기 없이 하얗고 날카롭게 변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요섭은 다리가 꺾이고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비쩍 마른 몸에서 가늘게 경련이 일었다.

요섭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가혹한 운명. 자신의 몸에서 뛰는 심장 소리가 자기 귀에까지 들렸다. 주위에 사람들이 몰리고, 저 병은 그냥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그대로 둬야 해요, 라는 얼토당토않은 누군가의 말이 요섭의 귀에 아련하게 들렸다. 한참 후에 요섭의 입에서 푸, 하고 긴 숨이 터졌다.

 

 

*

 

푸켓에서 일어난 사건 이후로 수정이 사라졌다. 요섭이 혜민과 부부가 된 상황에서 그들 두 사람은 일상의 언어마저 잃어버린 삶을 살아야만 했다. 혜민은 낮이든 밤이든 긴 시간 동안 창밖 하늘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그녀의 하루치를 담보하는 생활이었다. 어쩌면 혜민에게 있어서 그 순간이 혼자만의 온갖 상상을 펼치며 제일 행복해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그렇게 우울증을 앓았다.

부부였지만 서로에게 그림자밖에 되지 못하는 두 사람.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상식에선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의 일이 잊히는 게 정상일 텐데, 그들에게서는 현재보다 과거의 기억이 더 또렷이 나타나는 과잉기억증후군 증상이 나타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증세가 악화하였다.

푸켓에서 본 햇살처럼 눈이 부시도록 맑은 날이었다. 비만해진 혜민은 겨우 백일 지난 아이를 안고 새가 되어 날았다. 그녀의 32년 삶 중에서 단 2년의 지옥 같은 생활에서 탈출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집 안으로 도는 찬바람에 요섭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 터졌을 거란 직감이 일자 그의 몸에서 소름이 쫙 끼쳤다.

요섭이 베란다로 뛰어갔을 땐, 새장을 뛰쳐나간 새가 날개를 펼친 채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빼고는 비참하거나 슬픈 기색이 전혀 없었다.

요섭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집안으로 파고드는 햇살에 먼지들이 빛줄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며 떠다녔다. 그의 눈에 보이는 먼지가 굽은 벌레처럼 보였다.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요섭은 천천히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의 앞에 경찰관 두 명과 경비원과 처음 보는 이웃의 얼굴들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두꺼운 안경을 쓰고서, 사람을 쳐다볼 땐 눈을 위로 치켜뜨는 앞집 노파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호텔 바에서 두 쌍의 신혼부부가 저녁 시간을 즐겁게 보내고 있었다. 훗날 세월을 거슬러서 되새겨볼 추억을 남기자며 평상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말에도 신부들이 쾌활하게 웃어댔다. 혜민이 탁자를 가볍게 툭툭, 치면서 말했다.

“호텔 객실도 같은 층이라니, 참 신기한 일이죠?”

“그래요. 우연한 인연이 아닌 거 같네요.”

수정은 혜민의 말에 소극적으로 대답했다. 김산은 술기운이 돌자 말이 많아지는 편이었다. 군복무 경험담을 시끄럽게 떠드는 김산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 요섭의 눈이 혜민의 귓불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귀불알이라는 귓불 위에 옴폭 들어간 부분을 여자의 숲속 뽁 모양과 일치한다고 굳게 믿는 요섭. 그런 그가 짓궂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요섭은 술잔을 입에 대며 슬쩍슬쩍 수정과 혜민의 귓불을 비교했다. 그러자 그의 아랫도리가 슬쩍 경직되었다. 요섭은 수정에게 룸으로 올라가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 수정도 그럴 마음이었을까 요섭을 향한 곁눈질이 잦았다. 그러나 김산과 혜민이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야슬대며 까르륵거리던 수정과 혜민의 말소리가 점점 어눌해졌다. 달콤한 허니문을 꿈꾸어야 할 신부들이 그만 많이 취하고 말았으니. 올라가자는 요섭의 말에 수정과 혜민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이 휘청대는 상태로 보아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수정이 평소 술을 잘하지 못하는데, 재미있는 수다와 들뜬 기분 탓에 그만 자기도 모르게 과하게 마신 모양이다. 김산이 혜민을 부축하며 앞섰다. 요섭도 수정을 부축했다.

“신혼 첫날인데… 이게 뭐람.”

요섭의 말에 김산이 킥킥, 웃었다.

“그러게, 객실로 가서 상황을 보고 아니다 싶으면 연락할 테니 우리끼리 한잔 더 하자고?”

능청거리는 김산의 말에 요섭은 대답 대신 심드렁한 표정에 입꼬리만 살짝 올리다 바로 풀었다. 수정이 객실에 들어서자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대(大)자로 뻗어버렸다. 요섭은 수정의 겉옷을 벗겼다. 술에 취해서 혼절한 신부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마치 윤슬같이 다정했다.

요섭이 그녀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그녀의 가슴을 만지려다 그만두었다. 평생에 있어 제일 소중한 밀월여행이라는 걸 생각했다. 물티슈로 수정의 손발을 닦아주고 있을 때, 객실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요섭의 눈이 객실 출입문을 향했다. 저 새끼는 지 신부보다 내가 더 좋은가, 지랄맞게 잽싸게도 왔네.

요섭은 수정의 잠자는 모습을 보며 곁에 있고 싶었지만, 사나이라는 묘한 승부욕에 사로잡혀서 김산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다시 바에 내려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술을 마셔댔다. 누가 주량이 더 센지, 마치 수컷 세계에서 지지 않으려는 경쟁에 돌입한 듯했다.

처음엔 결혼 생활에 대한 원대한 꿈 얘기가 주된 대화였지만, 취기가 많이 돌자 상투적인 말로 이어졌다. 김산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실없는 소리를 계속해댔다.

“저기 있는 미인들을 보니 벌써 바람피우고 싶어지네.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야.”

요섭은 그를 경멸한다는 눈길을 주며 말했다.

“그건 너무하지. 잉크도 마르기 전에… 아니지 아직 펜촉에 잉크를 찍지도 않았잖아.”

김산은 더 거들먹거렸다.

“이제 불행의 시작인 거지. 매여 사는 소처럼.”

요섭이 몸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

“소더러 너 맘대로 살라 하면 싫다고 할 걸. 밥 챙겨주지, 재워주지, 등 밀어주지, 그보다 더 좋은 게 또 있을까.”

김산이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거기다 섹스도 맘껏 하겠지. 섹스가 없다면 무용한 결혼인 거지. 암만, 남자들이 힘들게 여자의 비위를 맞추며 사는 이유가 뭐겠어. 다 그 목적인 거지.”

요섭은 생각했다. 남자들이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속물 같은 것일까. 취기 탓으로 신혼여행 첫날이라는 경건한 인식이 그만 흐려지고 말았다. 두 사람 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지경이 되자 김산이 혀 꼬부라진 말로 색시가 기다린다며 요섭을 잡아끌었다. 그때 요섭이 테이블과 테이블 아래 바닥을 번갈아 가며 무얼 찾고 있었다.

“내 윗주머니에 카드키가 없네. 아까 탁자 위에 올려놓은 거 같기도 하고… 여기 카드키 있는 거 못 봤어?”

김산은 저절로 내려오는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그거 내 꺼잖아!”

요섭의 언성이 높아졌다.

“무슨 소리야! 내 꺼지! 빨리 주머니 뒤져봐!”

김산의 주머니에서 카드키 두 개가 나왔다.

“이런 불량하기는… 벌써 남의 여자를 탐하려고!”

“에이, 내가 망나니일지언정 그 정도는 아니지….”

김산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카드키를 건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요섭은 취기를 못 이기는지 고개를 축 늘어뜨린 모습으로 서 있었다. 객실이 있는 8층에 두 사람이 내렸고, 요섭이 몸을 가누기 힘들어하자 김산이 요섭을 802호실 앞까지 부축해주었다. 요섭이 객실 문에 카드키를 댔지만, 반응이 없었다. 요섭은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어 이마를 벽에다 박은 채, 옆에 서 있는 김산의 허리에다 주먹으로 질러버렸다. 욱, 하는 비명과 함께 김산이 벽에서 떨어져서 요섭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왜 그래, 뭐가 잘못됐어?”

“에이씨, 여기가 아니잖아!”

“그럼 내 방인가, 내 키를 대볼게.”

김산이 자기 카드키를 대자 문에서 척하고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김산이 요섭의 등을 가볍게 쳤다.

“이런 병신, 방이 바뀐 거잖아. 여긴 내 방, 니 방으로 가자고.”

김산은 다시 복도 반대쪽으로 요섭을 이끌었다. 두 사람이 뒤엉켜서 두 걸음 앞으로 갔다가 뒤로 한 걸음 물리듯 그렇게 겨우 앞으로 나아갔다. 김산은 혀 꼬부라진 소리로 해병대 군가를 흥얼거렸다. 809호실 앞에 도착해서 요섭이 객실 문에 카드키를 대자 스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김산이 객실 문을 열어주며 요섭의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 방이네. 한 번 해병은.”

요섭이 제대로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

“여엉원한 해에병!”

“오케이, 좋은 꿈 꾸셔.”

요섭이 객실로 들어가자 김산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두 팔을 어깨높이로 들어 흔들며 반대편 복도 끝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요섭은 자고 있을 수정이 생각에 숨죽이며 객실로 들어섰다. 혹시 깨어서 기다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그의 희망 사항이었을 뿐, 수정은 엎드려서 약간 웅크린 모습을 한 채 곯아떨어져 있었다. 아마 속이 매슥거려서 저 자세로 취하고 있을 거라고 요섭은 생각했다. 참새처럼 조잘대던 아까 수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장 침대로 뛰어 들어가 그녀를 품고 싶었지만, 첫날이니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겠지라며 잠자는 그녀가 요섭의 맨몸을 볼 일 없을 텐데, 그는 취기 때문에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몸으로 겨우 가운을 걸치고 욕실로 향했다.

욕실로 들어선 요섭은 바로 서지 못하여 한 손으로 벽을 짚어가며 샤워를 했다. 얼마나 기대한 꿈이든가. 그의 흑심을 내려다보았다. 술이 너무 과한 탓인지 그놈도 축 늘어져 있었다. 인마, 너도 긴장되지. 그렇다고 너답지 않게 움츠리고 있으면 어떡해. 비누칠한 흑심을 한 손으로 빡빡 문질렀다. 샤워 시간이 평소보다 길었다. 욕실에서 나온 요섭이 수정을 그녀의 등 뒤에서 살며시 끌어안았다. 죽은 사람처럼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그 또한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 정도로 취했기 때문에 금세 움직임이 사라졌다.

날이 밝았다. 하지만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는 객실 안은 아직 어두웠다.

“자기야, 어제 나 데려다주고 또 나갔다 왔지? 나 어제 너무 많이 취했었나 봐. 실수한 거 없었어?”

그녀가 눈을 감은 채 잠긴 목소리로 느리게 말할 때, 요섭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때 요섭의 휴대폰에서 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요섭은 전화를 받으려고 일어나다 말고 몸이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고압 전류가 그의 머리를 강하게 때렸다. 눈앞에 보이는 얼굴이 수정이 아니었다.

휴대폰에 찍힌 번호가 수정의 것. 맙소사, 이건 분명 악마의 장난질이다. 요섭은 자신도 모르게 악,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침대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 소리에 눈을 뜬 혜민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당신들 무슨 짓을 한 거야! 짐승 같은 새끼들! 신혼여행 와서 이런 변태 짓을 한 거냐고!”

안 돼, 안 되는 일이야. 요섭은 허둥댔다. 그는 수정이 있는 방으로 뛰었다. 너무 당황해서 객실이 몇 호인지 기억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냥 짐작으로 한 객실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눌렀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주먹 쥔 손으로 문을 두들겼다. 그때 문이 열리고 수정의 손이 요섭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는 아파할 경황이 없었다.

“수정아, 괜찮아?”

“니 눈에는 괜찮아 보이냐?”

“모르겠어. 술이 너무 과했나 봐.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아.”

김산은 보이지 않았다. 수정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악을 쓰며 울었다. 요섭은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도 이때까진 수정의 마음을 달래면 잘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

 

네 가족 중 세 가족 집안 어른들이 모였다. 김산의 부모님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한자리에 모인 어른들은 말이 없었고 간간이 한숨을 토했다. 긴 침묵 속에서 별안간 요섭의 어머니가 요섭의 등을 내리치며 절규했다.

“어째 이런 일이…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겠네. 이 사태를 어쩌면 좋다니. 아이고 이놈아,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어떻게 살아갈래.”

너무나 큰 충격으로 모두가 공황상태였다. 소식에 의하면 김산은 아예 종적을 감춰버렸다. 이 자리에 요섭만 아버지에게 잡혀 왔다. 혜민의 어머니는 아예 울음을 터트렸다. 혜민의 아버지가 자기 아내를 진정시킨 후 말했다.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라 쉽게 수습될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그저 넋 놓고 있을 일은 아니지요. 물은 이미 엎질러졌지요. 하지만 함께 고민하다 보면 해결방법이 나오지 않겠어요. 젊은것들이 철없이 까불어대다 일어난 불상사이긴 하나, 그 탓만 할 수 없는 노릇이고 하니, 당사자들 의견도 중요하지만, 우리 어른들이 이성을 갖고 좋은 쪽으로 수습하는 게 어떨지요?”

다들 만나서 뭘 어쩔 거냐면서 거절했지만, 원래 오지랖이 넓은 혜민의 아버지가 어른들에게 일일이 전화로 설득해서, 그의 지인이 운영하는 식당에다 어렵사리 만든 자리였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도 당연히 대화를 주도해 나가야 할 사람이 혜민의 아버지였다.

“결혼이라는 건, 아무 관계가 없던 남녀가 만나서 혼례식이라는 잔치로 집안 어른들께 진정한 성인의 자격과 책임을 허락받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여, 결혼은 혼인할 당사자의 뜻 못지않게 집안 어른들의 뜻 또한 아주 중요하다고 봅니다. 어떻게든 제 딸 짝은 여기서 결정하겠습니다.”

“차암 속도 좋구려! 이 상황에 그런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나와요?”

혜민의 어머니가 날카롭게 남편을 쏘아붙였다. 혜민의 아버지는 요섭에게 물었다.

“한쪽은 한방에서 같이 자기는 했으나 별일이 없었고, 한쪽은 건너지 말아야 할 사태까지 갔다는데, 그래도 자네가 모든 걸 덮고 가면 잘 해결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뭐냐면 말이지… 그래, 이런 말 하는 나도 참 난감하네만… 말인즉슨 신부를 바꾸는 거로….”

일시에 모든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건 너무 충격적인 말이었다. 요섭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는 혜민의 아버지 얼굴을 노려봤다. 정말이지 이건 사람으로서 느끼는 최고의 모멸감이었다. 요섭의 어머니가 분노했다.

“이건 개새끼 접붙이는 것도 아니고, 그게 말이 된다고 보는 겁니까? 당신 딸 시집 못 갈까 봐 환장한 거냐고?”

그러자 혜민의 어머니가 요섭의 어머니와 자기 남편을 번갈아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뭔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해요! 그러고 당신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 춰요! 이런저런 말할 거 없이, 이 결혼 쪽 냅시다! 남자것들은 지가 지은 죄를 모르고 잘 살아가겠지만, 여자는 그 죄를 평생 떠안고 살아야 하는데, 무슨 낙을 보겠다고 여기서 결혼 운운합니까! 이거 다 남자들이 저지른 일이니까 그쪽에서 손해배상 다 해줘야지요! 안 그래요! 그런데 어디서 꼼수를 부립니까!”

혜민의 아버지는 인내심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지나칠 정도의 낙천적인 성격인지, 아니면 황소고집인지, 다른 사람의 말은 아랑곳없이 계속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여보, 당신 심정을 이해하네만, 감정만 내세우지 말고 이성적으로 잘 해결되게끔 해야지. 저쪽 새댁에게 덜컹 애라도 들어서면 어떡하나?”

그때 날카로운 고성의 비명이 터졌다. 수정의 어머니였다. 극에 달한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해! 이건 소송으로 가야 할 문제라고! 이 짐승만도 못한 것들! 그 부모에 그 자식이지! 남의 딸 신세 망쳐놓고 무슨 개수작이야! 뭐, 바꿔서 살라고! 당신 딸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으니 괜찮다는 건가! 차암 추한 사람이네!”

그때 수정의 아버지 손에서 날아간 물컵이 얼른 얼굴을 돌려서 피한 혜민의 아버지 옆을 지나서 벽에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났다. 수정의 아버지가 혜민 아버지의 멱살을 잡았다.

“남의 귀한 딸을 망쳐놨는데, 말이면 다 말이냐고! 이 천박한 인간아!”

수정의 아버지는 혜민 아버지의 멱살을 잡은 채 분노하였다. 요섭이 일어나 수정 아버지의 팔을 잡고는 아버님 죄송합니다, 라는 말만 계속 되풀이하였다. 수정의 아버지가 요섭의 뺨을 후려쳤다.

“이 병신 같은 새끼! 내가 너 같은 놈을 귀한 사윗감이라고 좋아했던 걸 생각하면 원통하고, 분하고, 구역질이 다 난다, 이놈아.”

수정의 아버지는 법정에서 보자며 소리치고는 수정의 어머니와 함께 밖으로 나가버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요섭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망설이기만 할 뿐, 그대로 앉아있는 자신이 오히려 이상했다.

“자네 말일세, 뭐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지. 세상에 별사람 없고, 살다 보면 다 거기서 거기고, 다 고만고만한 거지. 고약하긴 하네만 하룻밤을 같이 잔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 아니겠나.”

그런데 더욱이 이상한 건 요섭 아버지의 침묵이었다. 두 사람은 이미 사전에 교감이 있었던 것처럼 요섭의 아버지는 혜민의 아버지 주장에 대하여 전혀 분노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때 카랑한 목소리가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아빠 말씀대로 할게요! 신혼여행 가서 첫날밤을 같이 보낸 사람과 부부가 되는 게 이상할 거 없잖아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은 바로 혜민이었다. 요섭이 혜민의 얼굴을 보자 그녀가 당차다 못해 오히려 나름대로 진지해 보였다. 혜민은 요섭더러 빨리 결단하라는 듯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혜민의 눈빛이 너무 강하여 요섭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혜민의 어머니가 언성을 높였다.

“넌, 여길 왜 온 거야?”

혜민은 물러나지 않았다.

“전, 김산이라는 사람과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한 것도 아니고, 그냥 사람이 믿을 만하고 괜찮아 보여서 결혼까지 하게 된 거라고요! 중매결혼도 하는데, 그까짓 거 그 누구하고는 못 살겠냐고요!”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요섭은 혜민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다만 어떻게든지 이 사태가 잘 수습되어서 수정의 마음이 돌아와 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수정의 처신에 대해서 분노가 일었다. 정신 빠진 김산 놈은 그렇다 치자, 나 아닌 다른 남자가 몸을 덮쳐오는데 그것을 몰랐다니, 얼빠진 여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말이다. 요섭은 그 생각만 하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만약 이 자리에 수정이 있었다면 분명히 결혼 같은 건 다시는 하지 않을 거리며 악을 써댈 게 뻔했다.

사람의 앞날은 확실히 예측불허였다. 열쇠가 바뀌는 사소한 실수에서 시작하여 이렇게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 있는 사태에 이르렀다는 것에 그저 할 말을 잃을 뿐, 이것이 파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천국에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은 일찰나였다.

체념한다는 건 진리나 가치를 일으킬 수 없는 극도로 허무한 상태일까, 공허한 상태에서 오는 두려움, 어쩌면 영혼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육체, 차라리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 버렸으면 했다. 이런 엄청난 일이 닥쳤을 때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그 나약함 때문에 아주 비열한 인간인지를 극도로 보여준다 하겠다.

이미 신뢰가 깨져 버린 사람과의 사이가 앞으로 살면서 얼마나 상처가 치유될까 싶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혜민과 같이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자 일종의 분노였을까 아니면 자기 합리화일까, 오히려 자포자기는 죄책감을 사라지게 했다. 워낙 사태가 황당하다 보니 우스운 방법이 해결책이 되었다. 인생이란, 원래부터 해프닝이었을까.

 

*

 

아동복 코너에 있던 수정이 소란스러운 쪽으로 걸어갔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수정의 몸이 순간 휘청했다. 그때 누군가의 신고로 119구급대원들이 출동했다. 쓰러진 남자의 상태를 살피는 구급대원들. 병원으로 후송하기 위해 구급대원들이 구조용 침대에 요섭의 몸을 실었다. 구급대원 중 한 사람이 보호자가 있는지 물었지만, 보호자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수정은 자신도 모르게 대원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구급차가 떠나려 할 때, 수정은 다급히 구급차에 오르며 말했다.

“제가 이 사람 보호자예요.”

구급대원들이 수정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여성 구급대원이 물었다.

“보호자라고요? 이런 경우가 자주 있나요?”

“잘 모르겠어요. 아뇨, 없었어요.”

병원에 도착했어도 수정은 안절부절못하였다. 병원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 요섭을 애처로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수정. 그녀는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요섭의 입속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그가 속이 매슥거리는지 자꾸만 헛구역질을 해댔다. 간호사가 혈압을 체크하면서 수정에게 근래 요섭의 몸 상태에 관해서 물었다.

“전 몰라요. 10년 전의 사람이에요.”

순간 간호사의 손이 멈췄다. 요섭이 수정아, 하자 그녀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더는 그의 곁에 있을 수가 없어서 병원 로비로 나온 수정은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머릿속이 텅 빈 사람처럼 뜬금없는 손짓이며 말 그대로 불안, 초조한 상태였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었던 사람. 보고 싶어도 찾고 싶지 않았던 사람. 미워도 죽는 날까지 연을 끊을 수 없는 사람. 그의 분신이 수정과 연결이 되어 있는 현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 사랑은 죄악이고 분노는 징벌이었다. 수정은 전화를 걸었다.

“정요야, 집이니? 엄만 좀 늦을 것 같다. 갑자기 일이 좀 생겼네. 응, 그래.”

수정은 전화를 끊고 나서 병원 로비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어떻게 살았어. 왜, 몰골이 그 모양이야. 잘 살았어야지.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지. 김산인가 하는 그 작자는 가정을 꾸리고 잘 산다던데. 당신은 그게 뭐야. 여전히 그녀는 초조하고 불안한 모습이었다. 이게 잘못된 행동에 나쁜 결과라는 거야. 수정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불쌍한 사람. 불쌍한 사람….

 

너무 상처가 큰 까닭일까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 분노도 어색함도 없이 그저 무덤덤했다. 수정의 간청에 못 이겨서 요섭은 장기 입원을 해야만 했다. 검진 결과 몸의 장기라고는 하나도 성한 데가 없었다. 육신뿐 아니라 정신마저 피폐해진 상태였다. 그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으리라. 수정은 어떻게든 그를 붙들어 두어야 했다. 그를 그냥 보내면 안 될 불길한 예감 때문이기도 했다.

입원한 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하나가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요섭의 모습. 그가 차츰 안정을 찾아가게 되자 수정은 가끔 정요를 병실에 데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정요에게 요섭이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정요가 오면 요섭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정요가 병실을 나가자 수정이 말했다.

“당신이 이상하게 상상하는 것을 지워요. 하나도 죄가 묻지 않은… 나의 소중한 딸이에요.”

요섭은 정요라는 이름을 계속 되뇌었다. 안갯속에서 뭔가가 자신의 형태가 살아나는 그런 기분이었다. 이제 수정이 병실을 나가고 없을 때면, 요섭은 불안해져 마음이 술렁거렸다. 그는 과거의 기억을 잊으려고 애썼다. 할 수만 있다면 나쁜 그 기억들을 몽땅 땅에다 묻어버리든지, 용광로에다 다 태워버리든지, 아니면 피부를 벗겨서라도 세포 하나하나 깨끗이 씻어내든지, 정말로 그러고 싶었다. 육신의 병과 정신의 병을 같이 앓을 때, 분명한 것은 정신이 더 아팠다. 어떤 경우도 이보다 더 지독한 병마가 있을까.

요섭은 수정의 만류에도 퇴원하기로 했다. 보름 정도였는데, 서로에게 연민의 정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바래진 사진처럼 그전으로 되돌리기엔 너무나 많이 변해버렸다. 앙상한 뼈가 수정의 손을 잡았다.

“탕 속에서 몸을 오랫동안 불려서 묵은 때를 씻어낸 것처럼 이제 홀가분하네.”

수정이 눈물 흘리며 그를 껴안았다.

“벌써 10년이 흘렀네. 꿈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자 허망함과 분노와 좌절감… 그것을 감당해내기란 너무나 고통스러웠지. 내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 그때 찾아온 새 생명. 3개월이라는 말에 행복해야 했는데, 너무나 억울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지. 나의 배 속에 애가 없었다면 나도 당신처럼 폐인이 됐을 거야. 부모님도 나의 간절한 청에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하였고, 모든 걸 용서하기로 하셨던 거지. 두 분은 지금 전원생활을 하면서 여생을 마무리하고 계셔….”

요섭의 퀭한 눈망울에 물기가 젖었다. 슬며시 눈을 감으며 되뇌듯 느리게 말했다.

“생명, 그 생명들에게… 내가 큰 죄를 짓고 말았네. 내가 혹여 정요 곁에 그림자라도 머물러서는 안 될 거야.”

요섭은 수정의 새 생명이라는 말에 8년 전 일이 스쳐 지나갔다. 혜민이 아기를 안고 떠나던 날, 요섭의 마음은 얼음처럼 날카로워서 오히려 아무 감정이 일지 않았었다. 그때 그의 상태로 볼 때 인간의 인식 능력이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양심의 가책인지 그저 자신에게 살인자 누명을 스스로 씌우고, 자기를 학대하며 살았던 게 고작 그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짓거리였다.

“그날은 정요의 생일선물을 사기 위해 쇼핑센터에 갔던 건데, 당신을 만난 거고 보면 그게 다 핏줄의 힘일까….”

요섭은 여린 바람에 흔들리는 갈꽃처럼 가늘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가슴속이 저릿했다.

“핏줄!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 애 상상 속에서 아버지인 그 사람은… 그래, 그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으련만….”

말을 하는 내내 요섭의 눈동자가 허공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수정은 그런 요섭을 정면을 바라볼 수가 없어서 병실 벽면을 쳐다보며 말했다.

“견딜 수 있겠어?”

“괜찮아, 이제 마음이 평안해. 여기 오기 전까지는 하루라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었어. 그건 사랑이거나 그리움이 아니라 나에 대한 분노와 집착의 결합물이었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바닥까지 내려가서도 절대 희망을 찾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래도 나약하고 정이 그리운 게 인간이더라고.”

수정은 입가에 어줍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어디로 갈 거야?”

 

이 세상에 왔던 그 처음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