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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스토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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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명화

책 아이콘문학 이야기 창간호 2025년 4월 1호

추억은 얼마나 아름다운 은총인가. 그의 존재는 불쑥 찾아오는 치통처럼 가끔은 불편한 자책감을 안겨주곤 한다. 그와 나의 만남은 한 시대 젊음의 환희와 고뇌를 수놓다가 미완성으로 끝나버린 인연이라고나 할까. 강물처럼 도저한 운명의 물살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누군가는 헤어져야 하고 누군가는 만나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그 사실마저도 잊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공부를 중간에 포기할 만큼 내 삶이 절박했던 때가 있었다. 세상 가능성이 다 열려 있는 것처럼 충만하던 의욕은 사라지고 일해야 살 수 있다는 책임감이 더 컸다. 어느 날 우연히 본 시험에 합격하면서 내 인생은 또 다른 희망의 날개가 되었다.

나와 입사 동기가 4명이었다. 남자 둘, 여자 둘 남녀 짝을 이루어 두 사람은 수입부서로 또 다른 두 사람은 수출부서로 각각 배속되었다. 우리 넷은 입사 동기라는 남다른 애정도 있었지만, 나이도 비슷비슷해 퇴근길에 자주 어울려 다녔다.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등산을 가거나, 유원지를 산책하는 즐거움을 만끽했고, 날씨가 흐리면 흐린 대로 영화를 보거나, 찻집에 틀어박혀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곤 했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 사이에는 의좋은 동기라며 더러는 부러움을 사기도 하고 더러는 질투 섞인 미움을 받기도 했다.

어느 일요일, 수입부서에 근무하는 P로부터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동기들이 다 모인다기에 약속한 찻집으로 나갔다. 그는 안쪽 구석진 자리에 고독을 씹는 사람처럼 홀로 앉아 있었다.

“뭐야, 아직 아무도 안 나온 거예요?”

“글쎄, 오늘은 다들 바쁘다고 안 나온다네요. 그건 아니고, 사실은 우리 둘이 영화 보려고 불러낸 건데, 괜찮지요?”

그는 영화표 두 장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보고 싶던 <러브스토리>였는데 상영시간은 멀찌감치 있었다.

“4시 상영이면 아직도 멀었네요,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요.”

“아직 시간이 넉넉하니 점심은 조금 있다 먹고, 일단 앉아봐요. 음악도 듣고 차도 마시고 천천히 나가지요”

생각 없이 나는 그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주기로 하고 내가 좋아하는 비엔나커피를 시켰다. 차 주문을 받으러 온 레지에게 그가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주문해 나온 차를 막 입에 대려는 순간, 굵직한 톤의 디스크자키 목소리에 흠칫 놀라 나도 모르게 찻잔에서 입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 사연은 사랑 고백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꼭 고백하려 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남자가 있다는 걸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오늘 그녀와 함께 볼 영화 ‘LOVE STORY’의 주제가를 신청하셨네요.”

P는 나보다 2살 연하로 계집애처럼 얼굴도 하얗고 수줍음을 잘 타는 내성적인 편에 속했다. 그의 고향은 청양이었는데, 언젠가 사무실 직원야유회를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다는 청양으로 간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의 아버지가 농담 겸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 며느리 감 때문에 씨암탉을 잡았노라고’ 직원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 어찌나 민망했던지,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얼버무리고는 동네를 구경하는 핑계를 던져놓고 밖으로 나왔다.

2년 연하라는 것도 그랬지만 작은 키에 계집애처럼 예쁘장한 얼굴은 내가 꿈꾸던 이상형의 남자로서도 매력 상실이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가 남자로 느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날 그와 함께 본 영화, <러브 스토리>는 감동과 사랑으로 기억되기도 되지만, 내가 본 영화 중에 가장 슬프기도 했다.

부호의 아들 올리버(라이언 오닐 분)와 가난한 제니(알리 맥그로우 분)는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하게 된다. 주위 사람들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알콩달콩 행복한 생활을 이어간다. 사랑의 힘이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해 보이던지, 내가 만약 그런 사랑을 한다면 하루를 살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영화는 봤지만, 그와 나 사이가 거북할 만큼 묘한 분위기 속에 빠져들었다. 사무실 안에서나 밖에 나와서나 나는 부러 냉정함을 보이려 애썼고 그런 나를 보며 그는 저절로 풀이 죽어 갔다. 그해 겨울, 나는 엄마의 성화에 맞선을 보았고 이듬해 3월 맞선본 남자와 약혼했다. 눈발이 분분히 날리던 봄날 그는 느닷없이 사표를 내 던지고 입대를 서둘렀고 그해 가을 나는 결혼을 했다. 내가 생각하는 건 직장동료이거나 친구였다면 좋았을 것을, 그는 처음부터 나를 여자로 보았다는 것이 슬프고 애잔한 추억으로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도 나는 가끔 눈 오는 날 창 넓은 찻집에 홀로 앉아 눈 내리는 거리 풍경을 내다보기를 즐긴다. 눈 내리는 낭만적 분위기를 즐길 때마다 문득문득 찾아드는 추억의 삽화에서 나는 그와의 지난 풍경들을 그려본다. 그럴 때마다 잊힌 그리움의 흔적들이 하나둘 시나브로 떠오르곤 한다.

박원명화

<약력>

2002년 월간한국수필 등단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사)한국수필가협회 사무총장,

(사)국제 펜 한국본부, 문학의 집 서울 회원, 한국수필작가회 이사 겸 동인지 편집주간

작품집 : 수필집 『남자의 색깔』『길 없는 길 위에 서다』『달빛 사랑』 외 다수

수상 : 제9회 한국문협 작가상, 제39회 일붕문학상, 제42회 한국수필문학상 수상 외